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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물시리즈 1편 (다물개론)  
역사의 되물림(多勿)을 위하여

1. 多勿槪論
다물이란 단어는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생소한 단어이다. 근래 들어와서 민족재야사학의 대두와 우리 나라 전통 전반에 대한 관심의 급증으로 더러는 이 단어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다물의 당위성 문제까지 거론되는 듯하나, 그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

"다물"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北宋시대의 史家인 司馬光의 저서인 자치통감(資治通監)에 麗語謂復舊土爲多勿, 즉 '고려의 말로 옛 땅을 찾는 것을 다물이라 한다'고 적혀있다.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다름 아닌 고토회복이다. 단군조선이후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던 고구려의 역대 제왕들의 목표는 예외 없이 "다물"이었으며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이라고 일컬어지는 廣開土大帝의 정복활동도 기실은 고토회복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창업주 이신 "고주몽 성제(聖帝)"의 연호가 "다물"이었다. 그것이 현실적인 목표였던 아니었던 간에 다물은 고구려 까지도 국시(國是)로서의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침략기에도 "다물단"이라는 반민족행위자 응징단체가 활약한 바 있다. 다물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통일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물"이라는 개념이 고대에서부터 근현대까지의 우리 나라 역사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정신이요, 사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서 단재 선생께서 염려하신 "무정신의 역사"의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하더니 고토를 다물하기는커녕 우리의 전반적인 정신적인 주체성 마저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國是로서의 다물은 조선조의 숭유(崇儒)정책으로 인하여 거의 말살위기에 몰리게 되고, 조선왕조 몰락 후 일제 침략기에는 민족종교들에 인하여 어느 정도 부각이 되었으나, 그나마 대한민국의 수립이후 극심한 좌, 우 이념 대립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반공, 경제발전, 또는 세계화들의 단어 등이 國是인양 행세를 하고 있다. 그나마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목표인 남북통일이 서서히 우리 나라의 국시로 정립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통일은 일단 성취되고 나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한시적인 목표라는 문제가 있다. 통일을 이루고 국가적 통합작업이 완성되면 이 나라는 한국 전쟁이후의 최대 국가적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 때문에 국시 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방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다물의 국시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다물을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추상적 토의 대상으로만 둘 것이 아니라, 국가적 목표로 전환시켜 실제로 성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필자의 이러한 생각을 과대 망상적 발상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국토가 곧 국부였던 시대는 지나갔으며, 현실적으로 지배자가 바뀐 땅을 다시 차지하려는 것은 침략주의적 발상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필자를 설복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예나 지금이나 국제 경쟁에서 강자가 약자의 처지를 존중하여 주고 패권추구를 비난하는 도덕주의가 우의에 있었던 적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제 정치에서는 힘과 국익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와 같은 자원빈국이 많은 천연자원이 있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국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로 나라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힘과 국익만이 국제 정치의 진리라면 국가의 최고 목표는 어디까지나 "富國强兵"이다. "다물"은 부국강병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자체가 부국강병의 精華이다.

그러나 국시로서의 다물은 불행한 현대사에 의하여 한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으며 다물의 꿈을 꾸는 사람들조차 귀했던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었다. 비록 강단 사학의 퇴조로 다물이란 개념이 어느 정도 부각되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물을 비현실적인 망상정도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나마 다물이라는 개념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故土恢復을 실현 불가능한 상상으로 생각하며 다물의 진취적인 정신이나 이어받자고 주장하는 소극적인 패배주의자들도 있다. 필자가 이 단상에 나서게 된 것은 더 이상 다물을 꿈으로만 방치해 둘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물은 꿈이 아니다. 거시적인 계획과 확고부동한 실행의지만 전제된다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잠재적인 현실'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 잠재적 현실을 글자 그대로 현실로 만들 것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다물 사업이 완성되어 만주, 黃河以北, 몽고, 연해주 그리고 동 시베리아가 대한민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날, 우리들은 그 옛 단군 조선의 영광을 되찾게 되는 것이며, 우리 한민족은 다시금 대륙의 주인이 되어 세계를 무대로 雄飛할 것이다.


다물시리즈 2편 (다물의 역사)  
2. 다물의 역사

필자가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다물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연원을 유추하여 보면 그 연대는 고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북아의 광대한 제국이었던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조선국의 지배하에 있던 수많은 지역을 상실하였는데 "되물림(多勿)"이란 구체적으로 바로 그러한 고조선 영역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조선 이후에 나타난 모든 국가들의 시조들의 목표는 하나같이 "되물림(多勿)"이었으며, 소위 정사(正史)에 묘사 되어 있는 고구려 제왕들의 정복 전쟁, 고려 태조 왕건의 북진책, 고려 말 명장 최영의 요동 정벌 시도 모두가 신천지(新天地)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 일련의 고토회복(故土恢復)운동 이었던 것이다.

가. 고대
"되물림(多勿)"이란 단어가 등장하게 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정사에는 다물에 대한 간단한 언급만이 있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까닭에,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野史를 조명해 볼 수밖에 없다. "되물림(多勿)"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해는 서기 기원전 590년이라고 在野史書의 대표格인 桓檀古記의 〈檀君世紀〉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檀君朝鮮 38대 단군의 이름이 "多勿"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는 단순한 연대기에 지나지 않기에 그 임금의 이름으로서의 "다물"만 등장할 뿐, 그 이름의 의미나 연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우리는 다만 〈단군세기〉의 기록을 통해 "다물"이라는 단어의 역사가 오래되었음만을 확인 할 수 있을 뿐이다.

단군조선이 멸망하자 그 천제의 통치하에 있었던 제후국들은 제각기 살길을 도모하였고 우리 민족사는 바야흐로 열국(列國)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고리, 구려,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주나, 황룡, 낙랑, 남국 등의 제후국들이 자립하면서 한반도, 만주, 북중국 일부지역 에는 그 유명한 춘추전국시대와도 같은 혼란기가 도래하게 된다. 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明滅하여 갔으며, 서로와의 투쟁에서 살아남은 제후국들은 강력한 독립국가로서 역사 위에 등장하게 된다. 이 가운데 최초로 이 전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통치를 행사하게 된 국가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해모수의 北夫餘이다. 그러나 북부여도 겨우 6대라는 짧은 역사를 끝으로 사라졌으며 다시 혼란으로 접어들어 갔다가 북부여가 쌓아 놓은 기반을 토대로 하여 다시 일어선 것이 고구려이다. 이 와중에서 상당량의 영토가 상실되었는데 고구려 건국이후 벌어지는 모든 정복 전쟁이란, 이때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 우리민족의 영역으로 되찾는다는 고토회복의 일환이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을 일컬어 우리는 "多勿"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國祖 高朱蒙은 처음에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부터 고구려의 국시(國是)가 "多勿"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고주몽의 의지는 正史인 〈삼국사기〉와 野史인 〈한단고기〉의 三聖記에 기록되어 있다.  

- 王 三年 유월 여름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그 땅에 봉하였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되찾는 것을 다물이라고 하였으니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

- 계해년 정월 봄, 고추모(주몽)는 역시 天帝의 아들이라 칭하고 북부여를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단군의 장사(제사)가 다시 일어나고 해모수를 太祖로 삼으며 자신의 연호를 "多勿"이라 하였으니 이는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라.
-〈桓檀古記〉(三聖記)

이 기록들은 "다물"이 언제부터 고토회복의 개념으로 확립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미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부터 지배층이나 帝王들의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고주몽은 이러한 이념을 건국의 기치로 내걸고 고구려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건국이념은 고구려에서 자자손손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빈민 구제제도인 辰貸法을 실시한 고국천왕때의 명재상인 을파소는 이러한 이념을 명실공한 국시(國是)로 만들기 위해 "다물 흥방의 노래"를 제작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는 사실이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쓴 太白逸史에 나와 있다. 다물정신이 한껏 고양된 고구려는 이로 인하여 그 역사를 통틀어 대외 지향적인 정복 국가로 행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고구려의 통치 계급이 자기네들의 정복 정책에 민중들을 동원하기 위해 선전선동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선전선동 역시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이념이나 개념을 활용한 행위이며 이는 국가의 최대 목표는 언제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자치통감〉의 기록도 이러한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자치통감〉은 북송(北宋)의 司馬光이 북송 이전의 중국사를 총정리하여 집필한 사서이며 북송은 고구려가 멸망 이후 약 300년 후에 세워진 국가이다. 고구려의 대외지향성과 진취성, 그리고 호전적인 기상은 중국인들에게 뚜렷이 각인 되어 수 백년이 지나도 그 국가의 정사에 기록될 정도로 강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물"은 결코 고구려 一國에만 국한된 이념이 아니었다. 그 정신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들인 百濟 始祖 온조에 의해 백제에도 이어져 백제 역시 정복국가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小國)이었으나, 사실 진정한 백제의 모습은 그 유명한 카르타고와 같이 해상을 무대로 주름을 잡았던 거대한 해상 제국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삼국/남북조의 혼란기를 틈타 중국 동해안에 진출하여 광대한 식민지를 획득한 사실은 이미 중국 남조들의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국사교과서에 까지 명시되어있다. 이러한 백제의 진취성과 대외지향성도 모두 "다물"이라는 이념에 기초하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다물"은 이와 같이 진취적인 이념이었으며 '태평성대'나 '문치(文治)'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다.

"다물"이라는 이념의 원조격인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기타 국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구려를 이은 大震國 渤海는 애초부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건국이 되었으며 그 사실을 大震國 三代 황제인 무제(武帝)대무예가 일본의 성무천황(成武天皇)에게 보낸 국서에서 잘 드러나있다. 그 국서에서 자신을 '고려의 황제'라고 칭하였음은 대진국이 누구를 계승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 대진국도 11대 황제인 선제(宣帝)때까지 쉬지않고 정복책(고토 회복책)을 폈으며 그 기반은 역시 고구려로부터 이어받은 "다물"이념이었던 것이다.

나. 중세
北國 대진국 발해가 226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멸망한 후 역시 우리민족의 계통으로 간주되는 여진의 금제국(金帝國)이 몽골의 징기스칸에게 멸망당하고 나자 滿洲라는 우리민족고유의 영역은 원제국(元帝國)을 거쳐 明代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한족(漢族)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南國 신라도 후백제의 견훤에게 강타를 당한 후 국가를 지탱하지 못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하고 만다. 대진국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 시대가 종언을 고하자 이때부터 "다물의 개념"은 이전의 "고조선 영토회복"에서 "만주회복" 즉 "고구려 영토회복"으로 전환이 된다. 고려 태조가 북진주의자였다는 것은 기존 강단사학계에도 이미 인정이 되는 바이다. 高麗라는 국명 자체가 고구려에서 나온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는 후일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고려의 서희가 거란군 사령관인 소손녕을 상대로 담판을 지을 때 잘 드러난다. 왕건 자신도 北伐에의 의지가 있었기에 대진국 太子 대광현이 망명을 해 왔을 때 그를 후대(厚待)하고 거란에게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건국 초기에 대동강-원산선(大洞江-原山線)에 머물러있던 국경선을 청천강 유역까지 밀어 올라갔다. 아울러 자신의 유서(遺書)인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서경(西京)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매년 행차하도록 후대의 임금들에게 지시하였다. 그 이유란 태조 자신이 서경을 일종의 北伐 기지로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의 다물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사건이 있다. 다름아닌 仁宗時의 대위국(大爲國)운동과 고려말의 요동정벌이다. 대위국 운동은 기존 사학계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묘청의 난'이라고 일컬어지던 사건이다. 외척세도 정권을 획책하였던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이후의 고려 내정은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가까스로 난을 수습한 후에도 상당한 심리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인종(仁宗)에게 서경 출신의 승려였던 묘청이 접근하여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천도의 명분으로 개경(開京)의 지덕이 쇠하였으니 왕기(王氣)가 짙은 서경으로 옮기면 국운이 융성하여 36국의 조공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金國正伐)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한,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파와의 대결에서 패하면서 끝이 났다. 구한말의 유명한 사학자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 사건을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낭가(郎家)사상이 사대주의적 유가(儒家)사상에 패한 사건으로 규정지으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한 민족의 진취적 기상이 꺾이고 사대 사상이 민중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이를 "조선역사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고 명명하였다.

몽골 간섭의 암흑기가 지나간 후 고려는 공민왕의 자주정책을 펴면서 그 동안 침체되었던 국가 분위기가 고양되어 가고 있었다. 고려를 한 동안 괴롭혔던 왜구도 진포의 해전과 황산대첩으로 인하여 중대한 타격을 입고 수그러들었다. 공민왕은 이와 동시에 부계를 개혁하여 모든 제도를 문종 때의 제도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신돈을 통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 제도의 일신을 꾀하였다. 이는 그 동안 고려를 내정 간섭하여 왔던 몽골의 元朝가 멸망함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이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등장한 명조(明朝)는 느닷없이 고려의 쌍성총관부 수복을 트집잡아 이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하였다. 당시 고려의 명장 최영은 이러한 일방적인 통고에 분개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38,000의 요동정벌군을 소집하여 이성계, 조민수를 각각 우, 좌군 도통사로 삼아 요동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우왕과 최영을 축출한 후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감행하여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다물 사상과 관련이 깊다. 고려가 요동 정벌군을 소집하자 명조(明朝)는 그들의 정치적 공갈이 효과를 보지 못하였음을 인정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명의 위협이 사라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 기회를 고토회복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는 요동, 그리고 더 나아가 만주라는 땅이 자국의 실지(失地)였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만주가 남의 땅이라고 보았다면 요동정벌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다. 조선과 근·현대
민족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조선왕조와 그 태조인 이성계에 내리는 평가를 보면 매우 부정적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왕조는 시종일관 사대주의로 점철된 "의식 없는 시대"였으며 그러한 사대주의는 이성계 자신의 정치관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거부하고 回軍을 정당화시킨 명분인 사불가론(四不可論)중의 하나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불가'라는 대목에서 여름이라 비가 와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돌 수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出兵의 시기를 가을로 늦추어 달라는 요청은 요동정벌의 반대 이유가 이념적이 아니라 전략적, 또는 방법론적인 차원의 반대임을 엿 불 수 있다. 아울러 그 후에 북벌군의 양성에 주력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대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도 고토회복의 의지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왕위를 양위할 후 연이어서 일어난 1,2차 왕자의 난으로 북벌을 위하여 양성되었던 병사들은 모두 정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뒤이은 태종의 의흥삼군부 혁파와 사병금지는 태조의 모든 노력을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았다.

태조 이후 조선에서는 특별한 고토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는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등 일견 민족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도 고토회복을 위하여 군을 양성한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예종과 성종은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자주적 사서들에 대한 수집령을 내리고 그러한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하여, 세조 이후 지배층의 의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명종조에 시작되는 동서 당쟁, 그리고 조선을 강타한 임진, 병자 양난(兩亂)은 각각 조선의 의식 세계를 마비시키고 황폐화 시키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지난 후에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북벌시도로 알려진 孝宗의 북벌 계획이 있었으나 이것은 청에 대한 복수전쟁 준비 성격이 강하여, 효종이 과연 고토회복의 의지를 지니고 북벌을 결정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양지(陽地)에서의 다물론은-적어도 조선왕조에서 만은-그 초기를 제외하고는 전무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물론으로 대변되는 진취적 기상이 사라진 조선은 국가의 근본정책인 부국강병을 도외시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부국강병에 필수적인 체제의 개혁, 경제의 발전, 상공업의 활성화, 기술의 진보, 군사육성 등을 등한시하여 정인보 선생이 지적한 '가론(可論) 당쟁'이요, '가론 세도'요, '가론 살육'의 욕된 역사를 남긴 채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물론의 진취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국내외 에서는 우리 나라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이 일어나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천도교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3·1운동의 중추세력의 하나였으며, 大倧敎는 만주 독립군들의 물리적,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 침략기 동안 해외에서 활동한 단체 "多勿團"의 존재이다. 이는 "의열단"과 유사한 파괴조직으로서 대일 테러활동이나 반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단에 앞장 섰으며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이 이 단체와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물"이라는 개념이 비록 조선조에서는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못하였지만, 정치적인 탄압에도 소멸되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왔음을 입증하여 준 것이다.

 

[우리는 대륙 백제의 고토를 수복해야 합니다!]
산동, 천산, 양자강에 이르는 백제의 고토를 보라!



대륙 백제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우리의 고대사를 온전히 밝히기 어렵습니다. 영토적 고토수복이 아니라 정신사적 고토수복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백제의 대륙지명을 통해 우리는 옛 고조선의 강역까지 분명하게 파헤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백제의 대륙역사에 관심을 가져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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