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전 한국인들의 생활상 귀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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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본 글은 오소운 목사가 작성한 글을 스크랩하여 일부 재구성함. 선비]

 

 

외국 학자들이 보는 동이족(東夷族) 글 : 오소운 목사

 

 

▶ 들어가는 말 ◀

지금의 중국 중심부, 이 지역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중심에 있으면서 동아시아를 지배한 어질고, 예절바르고, 창의력이 넘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동이족(東夷族)」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도 동이족이요,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羲和子)는 물론,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도 동이족이다.

 

동양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최고의 성군(聖君)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동이족이요,

최초로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무장하여 박치기 전법으로 유명한 치우(蚩尤) 천황도 동이족이요,

갑골문자, 상형문자, 표의문자, 한문자(漢文字, 소위 漢文)를 만든 것도 동이족이요,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숙제(叔弟)까지도 동이족이다.

 

이 지도는 우리 조상인 동이의 나라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가

아시아의 동방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다.

 

이에 놀란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것으로 동이족이 한(韓)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자기네 조상이라고,「왜놈의 역사왜곡」보다 더한「뙤놈의 역사왜곡」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랑잎으로 해를 가리는 식의 치졸한 방식으로 저네들이 역사왜곡을 한다 해도, 자기들의 추악한 욕심만 드러낼 뿐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세계 석학들의 논문 중에서 동이가 우리민족의 조상임을 고증한 글과 그들의 업적을 모아 여기 실림으로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바이다.

 

 

(1) 서량지(徐亮之) 교수 :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

“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1) 장개석(蔣介石) :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은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고향이 옛날 백제(*대륙백제) 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진 설명> 왼쪽이 장개석, 가운데가 그의 부인 송미령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2-2) 임어당(林語堂):

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여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20세기 최대 학자 임어당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박사  .

 

▶ 안호상 :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에 문제가 많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 임어당 :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안을 당한 안호상 박사는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史記) (五帝本紀).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그는 이런 글도 썼다.

 

“4천 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묘족(苗族)은 오늘날 현재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묘족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치우천황을 기리는 정통 구전가요가 올라 있어 원문과 함께 번역해 실린다.

蚩尤挽歌 ( 苗族 傳統 口傳 歌謠 묘족 전통 구전 가요 * 오 소운 역)

千古奇才横空贤,천고기재 횡공현 천고기재 영웅이신 치우 천황을

可堪并论炎皇間。가담병론 염황간 염제씨나 황제씨와 어찌 비하랴

五兵刑法君始点 오병형법 군시점 5병기와 형법까지 친히 만드사

九黎生气冲云天。구려생기 충운천 구려백성 사기높여 충천케 했네

席卷中原华夏联,석권중원 하화련 중원땅의 하화연맹 쳐서 이기니

血染江河五千年。혈염강하 오천년 오천년의 강의물이 피로 흐르네

英名不因涿鹿败,영명불인 탁록패 탁록에서 패한것이 원인 아님은

老黑石山百花宣。노흑석산 백화선 흑석산의 고운꽃이 증언 하누나

 

 

예기(禮記)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묘족은 구려(九黎)의 후예다. 구려를 묘(苗) 민족의 선조로 삼고 있다.”

; 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 [禮記]

 

 

 

 

(4) 임혜상(林惠詳) 교수 :

홍콩대학의 임혜상(林惠詳) 교수는《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맹자가 말하기를「순(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舜)임금은 은(殷)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興起)하였다." (흥기 ; 흥하여 일어나다)

 

 

 

(5)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 :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그의 저서《고사변(古史辯), 192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조(玄鳥)는 은(殷)나라 사람과 동이(東夷)의 조상신이다.”; 玄鳥是殷人東夷的祖先神.

 

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小昊), 그리고 설(契)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6) 대만학자 노간(勞幹) :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 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 만일 이(夷)가 먼저 문화를 이루어 앞서 나갔다면, 이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사람 인(人)자는 전 인류적인 이름에 들 것이다.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려 쓴 것이다.”

 

 

 

(7) 중국학자 필장박(畢長樸) :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而係遠始于寒的北方.

 

 

(8) 일본학자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9)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 :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0) 소련의 역사학자 시로코고르프 :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오 소운 목사 : 대륙을 지배했던 우리민족의 역사가 분명 존재 하건만 백제가 대륙을 지배했다고 지나족 학자가 증언해왔건만

이 모든 사실에 눈감고 귀닫고 반도사관만 짖어대는 사학자들

치우천황은 있지도 않는 인물드립을 치다가 실존 인물로 밝혀지자 동이족의 원래의 뜻이 지나족이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르던 칭호였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 됐으니 우리는 동이족이 아니다 동이족은 우리민족이 아니다 드립 신채호 선생을 과대망상증 환자 쇼비즘이라고 떠들던 것처럼 우리민족이 대륙의 창대한 역사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외국학자들을 환빠라고 집단 정신병자들 이라고 말해봐 강단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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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자(선비) : 위 퍼온 글을 탐독하고 원작성자의 글 전체를 토대로 일부 재편집(첨언) 하면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 위의 글이 사실이라면 이는 너무 충격적이다.

-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원작성자의 취지를 공감하지만 민족의 자긍심 고취 및 방법을 좀 더 세련되게 하여야 한다.

- 본인은 전문가도 아니고 실증적 증거를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위 글은 이미 오랜 기간 다양한 형태로 학계, 방송, 언론, 인터넷에서 거론되었던 내용이라 개인적으로는 위 글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는 부분에 비중을 더 갖고 있다. 따라서 국가, 민족의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 확립을 위해서 정부차원에서 사실 확인에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 역사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고서적(古書籍)의 수집 확보 필요함.

- 국내수집 : 개인, 기관 소장 고서적 수집.

*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다량 보관, 공개 거부하고 있음

* 사찰, 서원, 향교, 고택, 고문서 수집상 협조로 사본 확보

- 해외수집 : 외교적 노력으로 수집.

* 일본 황실소장 고서 [일제식민시대 약30만권 수탈 추정]

* 중국/대만 소장 고서 [진실을 알기에 역사 날조 감행]

* 서양 소장 고서 [비단길 교역시대, 식민제국시대 수집]

 

 

 다물시리즈 1편 (다물개론)  
역사의 되물림(多勿)을 위하여

1. 多勿槪論
다물이란 단어는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생소한 단어이다. 근래 들어와서 민족재야사학의 대두와 우리 나라 전통 전반에 대한 관심의 급증으로 더러는 이 단어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다물의 당위성 문제까지 거론되는 듯하나, 그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

"다물"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北宋시대의 史家인 司馬光의 저서인 자치통감(資治通監)에 麗語謂復舊土爲多勿, 즉 '고려의 말로 옛 땅을 찾는 것을 다물이라 한다'고 적혀있다.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다름 아닌 고토회복이다. 단군조선이후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던 고구려의 역대 제왕들의 목표는 예외 없이 "다물"이었으며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이라고 일컬어지는 廣開土大帝의 정복활동도 기실은 고토회복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창업주 이신 "고주몽 성제(聖帝)"의 연호가 "다물"이었다. 그것이 현실적인 목표였던 아니었던 간에 다물은 고구려 까지도 국시(國是)로서의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침략기에도 "다물단"이라는 반민족행위자 응징단체가 활약한 바 있다. 다물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통일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물"이라는 개념이 고대에서부터 근현대까지의 우리 나라 역사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정신이요, 사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서 단재 선생께서 염려하신 "무정신의 역사"의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하더니 고토를 다물하기는커녕 우리의 전반적인 정신적인 주체성 마저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國是로서의 다물은 조선조의 숭유(崇儒)정책으로 인하여 거의 말살위기에 몰리게 되고, 조선왕조 몰락 후 일제 침략기에는 민족종교들에 인하여 어느 정도 부각이 되었으나, 그나마 대한민국의 수립이후 극심한 좌, 우 이념 대립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반공, 경제발전, 또는 세계화들의 단어 등이 國是인양 행세를 하고 있다. 그나마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목표인 남북통일이 서서히 우리 나라의 국시로 정립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통일은 일단 성취되고 나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한시적인 목표라는 문제가 있다. 통일을 이루고 국가적 통합작업이 완성되면 이 나라는 한국 전쟁이후의 최대 국가적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 때문에 국시 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방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다물의 국시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다물을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추상적 토의 대상으로만 둘 것이 아니라, 국가적 목표로 전환시켜 실제로 성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필자의 이러한 생각을 과대 망상적 발상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국토가 곧 국부였던 시대는 지나갔으며, 현실적으로 지배자가 바뀐 땅을 다시 차지하려는 것은 침략주의적 발상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필자를 설복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예나 지금이나 국제 경쟁에서 강자가 약자의 처지를 존중하여 주고 패권추구를 비난하는 도덕주의가 우의에 있었던 적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제 정치에서는 힘과 국익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와 같은 자원빈국이 많은 천연자원이 있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국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로 나라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힘과 국익만이 국제 정치의 진리라면 국가의 최고 목표는 어디까지나 "富國强兵"이다. "다물"은 부국강병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자체가 부국강병의 精華이다.

그러나 국시로서의 다물은 불행한 현대사에 의하여 한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으며 다물의 꿈을 꾸는 사람들조차 귀했던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었다. 비록 강단 사학의 퇴조로 다물이란 개념이 어느 정도 부각되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물을 비현실적인 망상정도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나마 다물이라는 개념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故土恢復을 실현 불가능한 상상으로 생각하며 다물의 진취적인 정신이나 이어받자고 주장하는 소극적인 패배주의자들도 있다. 필자가 이 단상에 나서게 된 것은 더 이상 다물을 꿈으로만 방치해 둘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물은 꿈이 아니다. 거시적인 계획과 확고부동한 실행의지만 전제된다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잠재적인 현실'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 잠재적 현실을 글자 그대로 현실로 만들 것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다물 사업이 완성되어 만주, 黃河以北, 몽고, 연해주 그리고 동 시베리아가 대한민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날, 우리들은 그 옛 단군 조선의 영광을 되찾게 되는 것이며, 우리 한민족은 다시금 대륙의 주인이 되어 세계를 무대로 雄飛할 것이다.


다물시리즈 2편 (다물의 역사)  
2. 다물의 역사

필자가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다물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연원을 유추하여 보면 그 연대는 고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북아의 광대한 제국이었던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조선국의 지배하에 있던 수많은 지역을 상실하였는데 "되물림(多勿)"이란 구체적으로 바로 그러한 고조선 영역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조선 이후에 나타난 모든 국가들의 시조들의 목표는 하나같이 "되물림(多勿)"이었으며, 소위 정사(正史)에 묘사 되어 있는 고구려 제왕들의 정복 전쟁, 고려 태조 왕건의 북진책, 고려 말 명장 최영의 요동 정벌 시도 모두가 신천지(新天地)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 일련의 고토회복(故土恢復)운동 이었던 것이다.

가. 고대
"되물림(多勿)"이란 단어가 등장하게 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정사에는 다물에 대한 간단한 언급만이 있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까닭에,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野史를 조명해 볼 수밖에 없다. "되물림(多勿)"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해는 서기 기원전 590년이라고 在野史書의 대표格인 桓檀古記의 〈檀君世紀〉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檀君朝鮮 38대 단군의 이름이 "多勿"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는 단순한 연대기에 지나지 않기에 그 임금의 이름으로서의 "다물"만 등장할 뿐, 그 이름의 의미나 연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우리는 다만 〈단군세기〉의 기록을 통해 "다물"이라는 단어의 역사가 오래되었음만을 확인 할 수 있을 뿐이다.

단군조선이 멸망하자 그 천제의 통치하에 있었던 제후국들은 제각기 살길을 도모하였고 우리 민족사는 바야흐로 열국(列國)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고리, 구려,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주나, 황룡, 낙랑, 남국 등의 제후국들이 자립하면서 한반도, 만주, 북중국 일부지역 에는 그 유명한 춘추전국시대와도 같은 혼란기가 도래하게 된다. 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明滅하여 갔으며, 서로와의 투쟁에서 살아남은 제후국들은 강력한 독립국가로서 역사 위에 등장하게 된다. 이 가운데 최초로 이 전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통치를 행사하게 된 국가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해모수의 北夫餘이다. 그러나 북부여도 겨우 6대라는 짧은 역사를 끝으로 사라졌으며 다시 혼란으로 접어들어 갔다가 북부여가 쌓아 놓은 기반을 토대로 하여 다시 일어선 것이 고구려이다. 이 와중에서 상당량의 영토가 상실되었는데 고구려 건국이후 벌어지는 모든 정복 전쟁이란, 이때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 우리민족의 영역으로 되찾는다는 고토회복의 일환이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을 일컬어 우리는 "多勿"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國祖 高朱蒙은 처음에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부터 고구려의 국시(國是)가 "多勿"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고주몽의 의지는 正史인 〈삼국사기〉와 野史인 〈한단고기〉의 三聖記에 기록되어 있다.  

- 王 三年 유월 여름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그 땅에 봉하였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되찾는 것을 다물이라고 하였으니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

- 계해년 정월 봄, 고추모(주몽)는 역시 天帝의 아들이라 칭하고 북부여를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단군의 장사(제사)가 다시 일어나고 해모수를 太祖로 삼으며 자신의 연호를 "多勿"이라 하였으니 이는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라.
-〈桓檀古記〉(三聖記)

이 기록들은 "다물"이 언제부터 고토회복의 개념으로 확립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미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부터 지배층이나 帝王들의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고주몽은 이러한 이념을 건국의 기치로 내걸고 고구려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건국이념은 고구려에서 자자손손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빈민 구제제도인 辰貸法을 실시한 고국천왕때의 명재상인 을파소는 이러한 이념을 명실공한 국시(國是)로 만들기 위해 "다물 흥방의 노래"를 제작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는 사실이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쓴 太白逸史에 나와 있다. 다물정신이 한껏 고양된 고구려는 이로 인하여 그 역사를 통틀어 대외 지향적인 정복 국가로 행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고구려의 통치 계급이 자기네들의 정복 정책에 민중들을 동원하기 위해 선전선동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선전선동 역시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이념이나 개념을 활용한 행위이며 이는 국가의 최대 목표는 언제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자치통감〉의 기록도 이러한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자치통감〉은 북송(北宋)의 司馬光이 북송 이전의 중국사를 총정리하여 집필한 사서이며 북송은 고구려가 멸망 이후 약 300년 후에 세워진 국가이다. 고구려의 대외지향성과 진취성, 그리고 호전적인 기상은 중국인들에게 뚜렷이 각인 되어 수 백년이 지나도 그 국가의 정사에 기록될 정도로 강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물"은 결코 고구려 一國에만 국한된 이념이 아니었다. 그 정신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들인 百濟 始祖 온조에 의해 백제에도 이어져 백제 역시 정복국가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小國)이었으나, 사실 진정한 백제의 모습은 그 유명한 카르타고와 같이 해상을 무대로 주름을 잡았던 거대한 해상 제국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삼국/남북조의 혼란기를 틈타 중국 동해안에 진출하여 광대한 식민지를 획득한 사실은 이미 중국 남조들의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국사교과서에 까지 명시되어있다. 이러한 백제의 진취성과 대외지향성도 모두 "다물"이라는 이념에 기초하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다물"은 이와 같이 진취적인 이념이었으며 '태평성대'나 '문치(文治)'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다.

"다물"이라는 이념의 원조격인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기타 국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구려를 이은 大震國 渤海는 애초부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건국이 되었으며 그 사실을 大震國 三代 황제인 무제(武帝)대무예가 일본의 성무천황(成武天皇)에게 보낸 국서에서 잘 드러나있다. 그 국서에서 자신을 '고려의 황제'라고 칭하였음은 대진국이 누구를 계승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 대진국도 11대 황제인 선제(宣帝)때까지 쉬지않고 정복책(고토 회복책)을 폈으며 그 기반은 역시 고구려로부터 이어받은 "다물"이념이었던 것이다.

나. 중세
北國 대진국 발해가 226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멸망한 후 역시 우리민족의 계통으로 간주되는 여진의 금제국(金帝國)이 몽골의 징기스칸에게 멸망당하고 나자 滿洲라는 우리민족고유의 영역은 원제국(元帝國)을 거쳐 明代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한족(漢族)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南國 신라도 후백제의 견훤에게 강타를 당한 후 국가를 지탱하지 못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하고 만다. 대진국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 시대가 종언을 고하자 이때부터 "다물의 개념"은 이전의 "고조선 영토회복"에서 "만주회복" 즉 "고구려 영토회복"으로 전환이 된다. 고려 태조가 북진주의자였다는 것은 기존 강단사학계에도 이미 인정이 되는 바이다. 高麗라는 국명 자체가 고구려에서 나온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는 후일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고려의 서희가 거란군 사령관인 소손녕을 상대로 담판을 지을 때 잘 드러난다. 왕건 자신도 北伐에의 의지가 있었기에 대진국 太子 대광현이 망명을 해 왔을 때 그를 후대(厚待)하고 거란에게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건국 초기에 대동강-원산선(大洞江-原山線)에 머물러있던 국경선을 청천강 유역까지 밀어 올라갔다. 아울러 자신의 유서(遺書)인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서경(西京)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매년 행차하도록 후대의 임금들에게 지시하였다. 그 이유란 태조 자신이 서경을 일종의 北伐 기지로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의 다물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사건이 있다. 다름아닌 仁宗時의 대위국(大爲國)운동과 고려말의 요동정벌이다. 대위국 운동은 기존 사학계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묘청의 난'이라고 일컬어지던 사건이다. 외척세도 정권을 획책하였던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이후의 고려 내정은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가까스로 난을 수습한 후에도 상당한 심리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인종(仁宗)에게 서경 출신의 승려였던 묘청이 접근하여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천도의 명분으로 개경(開京)의 지덕이 쇠하였으니 왕기(王氣)가 짙은 서경으로 옮기면 국운이 융성하여 36국의 조공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金國正伐)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한,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파와의 대결에서 패하면서 끝이 났다. 구한말의 유명한 사학자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 사건을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낭가(郎家)사상이 사대주의적 유가(儒家)사상에 패한 사건으로 규정지으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한 민족의 진취적 기상이 꺾이고 사대 사상이 민중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이를 "조선역사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고 명명하였다.

몽골 간섭의 암흑기가 지나간 후 고려는 공민왕의 자주정책을 펴면서 그 동안 침체되었던 국가 분위기가 고양되어 가고 있었다. 고려를 한 동안 괴롭혔던 왜구도 진포의 해전과 황산대첩으로 인하여 중대한 타격을 입고 수그러들었다. 공민왕은 이와 동시에 부계를 개혁하여 모든 제도를 문종 때의 제도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신돈을 통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 제도의 일신을 꾀하였다. 이는 그 동안 고려를 내정 간섭하여 왔던 몽골의 元朝가 멸망함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이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등장한 명조(明朝)는 느닷없이 고려의 쌍성총관부 수복을 트집잡아 이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하였다. 당시 고려의 명장 최영은 이러한 일방적인 통고에 분개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38,000의 요동정벌군을 소집하여 이성계, 조민수를 각각 우, 좌군 도통사로 삼아 요동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우왕과 최영을 축출한 후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감행하여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다물 사상과 관련이 깊다. 고려가 요동 정벌군을 소집하자 명조(明朝)는 그들의 정치적 공갈이 효과를 보지 못하였음을 인정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명의 위협이 사라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 기회를 고토회복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는 요동, 그리고 더 나아가 만주라는 땅이 자국의 실지(失地)였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만주가 남의 땅이라고 보았다면 요동정벌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다. 조선과 근·현대
민족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조선왕조와 그 태조인 이성계에 내리는 평가를 보면 매우 부정적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왕조는 시종일관 사대주의로 점철된 "의식 없는 시대"였으며 그러한 사대주의는 이성계 자신의 정치관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거부하고 回軍을 정당화시킨 명분인 사불가론(四不可論)중의 하나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불가'라는 대목에서 여름이라 비가 와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돌 수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出兵의 시기를 가을로 늦추어 달라는 요청은 요동정벌의 반대 이유가 이념적이 아니라 전략적, 또는 방법론적인 차원의 반대임을 엿 불 수 있다. 아울러 그 후에 북벌군의 양성에 주력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대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도 고토회복의 의지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왕위를 양위할 후 연이어서 일어난 1,2차 왕자의 난으로 북벌을 위하여 양성되었던 병사들은 모두 정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뒤이은 태종의 의흥삼군부 혁파와 사병금지는 태조의 모든 노력을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았다.

태조 이후 조선에서는 특별한 고토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는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등 일견 민족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도 고토회복을 위하여 군을 양성한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예종과 성종은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자주적 사서들에 대한 수집령을 내리고 그러한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하여, 세조 이후 지배층의 의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명종조에 시작되는 동서 당쟁, 그리고 조선을 강타한 임진, 병자 양난(兩亂)은 각각 조선의 의식 세계를 마비시키고 황폐화 시키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지난 후에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북벌시도로 알려진 孝宗의 북벌 계획이 있었으나 이것은 청에 대한 복수전쟁 준비 성격이 강하여, 효종이 과연 고토회복의 의지를 지니고 북벌을 결정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양지(陽地)에서의 다물론은-적어도 조선왕조에서 만은-그 초기를 제외하고는 전무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물론으로 대변되는 진취적 기상이 사라진 조선은 국가의 근본정책인 부국강병을 도외시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부국강병에 필수적인 체제의 개혁, 경제의 발전, 상공업의 활성화, 기술의 진보, 군사육성 등을 등한시하여 정인보 선생이 지적한 '가론(可論) 당쟁'이요, '가론 세도'요, '가론 살육'의 욕된 역사를 남긴 채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물론의 진취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국내외 에서는 우리 나라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이 일어나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천도교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3·1운동의 중추세력의 하나였으며, 大倧敎는 만주 독립군들의 물리적,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 침략기 동안 해외에서 활동한 단체 "多勿團"의 존재이다. 이는 "의열단"과 유사한 파괴조직으로서 대일 테러활동이나 반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단에 앞장 섰으며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이 이 단체와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물"이라는 개념이 비록 조선조에서는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못하였지만, 정치적인 탄압에도 소멸되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왔음을 입증하여 준 것이다.

 

[우리는 대륙 백제의 고토를 수복해야 합니다!]
산동, 천산, 양자강에 이르는 백제의 고토를 보라!



대륙 백제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우리의 고대사를 온전히 밝히기 어렵습니다. 영토적 고토수복이 아니라 정신사적 고토수복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백제의 대륙지명을 통해 우리는 옛 고조선의 강역까지 분명하게 파헤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백제의 대륙역사에 관심을 가져 보세요!

 

 

실존역사

북부여의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며 어미가 유화부인이라고

하며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따져볼때

 해모수의 아들이 해루부이고 그의 양아들이 금와이므로

주몽과 금와는 삼촌사이이며 대소왕자는 주몽에게 할아버지정도로 불러야 할정도로

오류가 생김

그렇다면 환단고기를 끼워놓으면



위와 같이 나오는데 해모수가 왕을 칭하는 칭호가 ?瑛? 가능성을 생각할때

이해가 되죠.

모든기록을 근거로

주몽은 정치적인 상황에서 쫓겨나게 되며

오이,마리,협보등을 데리고 소서노의 세력과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게 되며

기록으로 북부여가 없는것을 볼때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북부여를 멸망시키고 동부여의 땅을 빼앗으며 세력을 떨쳤다고 볼수 있겠는데

드라마에서는

같은 시대에 해모수가 나오며 일개 장수로 나옵니다.

금와왕과 유화부인과의 관계가 이상하게 나옵니다.

주몽이 도망친것은 좋은데 건국은 무시하고 해모수를 만나지 않나

도로 돌아오질 않나 기록과 년대가 뒤죽박죽인데

 

만약 드라마를 고증으로 한다면

주몽은 정치적 박해로 인해 친위세력과 오이,마리,협보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그곳의 소서노세력과 연합하여

그곳의 통치자 연타발의 힘을 얻어 세력을 장악하고

주몽은 이미 부인과 자식을 둔몸이며 소서노역시 우태의

아들까지 있는 상태였지만 주몽에게 희망을 걸고 정치적 파트너로 삼는다.

주몽은 나중에 고구려를 세우고 북부여,동부여공략에 나서서 북부여를 멸망시킨다.

 

정도가 되겠는데

 

드라마가 고증과 정확을 따지면 역사스페셜을 드라마로 만들거나 아예 북한에서

고구려 드라마를 찍던지 해야지 많은것을 바라기에는 무리인듯합니다.

 

<발해국왕세략사>(태조 진국왕의 성은 대이며 휘는 중상이다.)

.....!

진국의 대중상과 발해국의 대조영에 대해 혼동하는 분은

<류취국사> (.....아메노마무네 도요호오찐 천황 2년에 대조영이 처음으로 발해국을 세웠다)고 하였고

 

발해는 역시 당이 정한것이 아니라 당과의 자존심 싸움의 결과이며

대조영이 자신의 태자에게 <께루국왕>으로 책봉한것을 볼때

고구려 태왕처럼 여러소왕을 거느린 황제국입니다.

 

 

원래하고자 한 이야기보다 많으며 9000년우리역사이야기 게시판에 적으려고 했는데

보려는 사람도 없을것 같고 해서 여기에 적었으니 명심하시길............

고구려 건국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주몽>이 5월부터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재미있는 드라마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상황설정과 지나친 극적 구성으로 실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에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대사의 고리를 고스란히 복원시켜주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드라마 <주몽> 시대의 역사를 알아보고 한민족 상고사의 국통맥을 간추려 소개한다.
 
 
 
어린시절 주몽은 겁쟁이?
 왜곡의 한 예로,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의 인물됨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주몽은 ‘기골(氣骨)이 뛰어나 범인과 달랐으며, 불과 일곱 살이 되어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나온다. 그래서 ‘(동)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에(善射者謂朱蒙) 그를 또한 주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주몽은 나이 스물이 되도록 활은 고사하고 칼 한번 들어보지 못한 겁쟁이로 나온다. 극적 전개를 위한 각색이라고 해도, 고구려 창업군주의 인물됨을 왜곡하는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드라마 <주몽>이 한민족의 상고사 특히 부여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천제지자(天帝之子) 고주몽     
 
근래 TV 사극은 옛사람들의 정신의 맥과 한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측면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야비한 다툼만을 부각시켜서 드러내는 경향이 짙다. <주몽> 역시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로,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정치사, 전쟁사로 몰아가는 문제점이 있다. 고대 인물들이 현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주몽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주몽이 영특하고 대범하고 영웅적인 기개가 있으니, (동)부여국 왕자들이 주몽한테 왕위를 뺏길까봐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주몽이 도망을 가다가 엄리대수(淹利大水), 즉 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 되는데, 뒤에서는 (동)부여 군사가 주몽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다.
 
 그 때 주몽이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나는 천제 즉, 상제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 이런 뜻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상제 문화, 천자문화가 생생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태왕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도 우리 고주몽 태조께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요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쓰여 있다. 그 말은, 당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대행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夫餘)사
 
이제 구체적인 역사 내용을 논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여사의 왜곡으로 인해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인 불리지(일명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과 해모수가 부부인연을 맺은 것으로 설정하여, 유화부인이 시증조할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런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
드라마에서는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원시)부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 수많은 부여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시청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몽이 태어난 나라는 ‘동부여’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 단군의 고손자로서 황손(皇孫)이다.(『삼국유사』도 분명히 해모수가 북부여의 건국자임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했던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과 국내사가들의 중국사 베끼기 |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잘 모르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에 기인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다 언급하기 힘들지만, 중국은 한(漢) 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이후로 동방의 천자국(天子國), 스승의 나라, 조선(朝鮮, 고조선)의 역사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은 세상에서 아는 것과 달리 하나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국 아래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일종의 연방체제로 이루어진 대제국이었다. 조선이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단지 제후국의 이름만 거론하면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후세의 김부식과 같은 우리의 역사가들은 중국인들이 써준 역사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탓에 우리의 역사, (고)조선사는 실체가 없는 신화로만 남게 된 것이다.
 
 (고)조선사를 역사 속에서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여사 또한 지우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 계승은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거쳐서 열국시대와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시대(대진국·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게 되는데, 북부여를 역사 속에서 지우면 뒤에 생겨난 국가들은 (고)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노렸던 것이다.
 
 
 
읽어버린 부여사
 그럼 구체적으로 부여의 정체를 풀어보자. 이것이야말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동양 한민족사의 실체에 얽힌 중대한 비밀코드를 풀어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역사 |
부여의 원뿌리는 (고)조선(朝鮮)이다. (고)조선은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나라를 크게 진한(辰韓, 후기엔 진조선) 번한(番韓, 후기엔 번조선) 마한(馬韓, 후기엔 막조선) 셋으로 나눠,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번한 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어 일종의 연방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삼한 안에도 더 작은 제후국들이 존재했다.
 
 
대부여의 등장 |
44대 단군은 구물(丘勿)단군이다. 그는 본래 43대 물리단군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43대 단군 때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 사냥꾼들을 모아 반역을 저질렀다. 그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물리단군이 피난 중에 죽자, 이에 맞서 반란자들을 제압한 이가 바로 상장군 구물이었다. 이에 5가(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 5인으로 구성된 조정의 주요 대신(大臣)들) 제신들은 그를 44대 단군으로 추대하게 된다.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개원(開原), 단군 44대~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고)조선의 종통은 보전하고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요컨대 (고)조선의 국호가 부여(대부여)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고)조선의 국통은 다름 아닌 부여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제식민사학을 답습한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과 부여가 어떤 관계이며, 또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어떻게 국통맥이 이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북부여의 등장 |
(고)조선 말기인 대부여로 오면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군권이 독립되고, 진조선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군웅들이 할거하며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는 50여년에 걸친 치세에도 결국 이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고, 5가 대신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은거하게 된다.(BCE 238) 이로써 2,096년간의 (고)조선은 막을 내리고, 5가(五加)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고)조선의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세력을 키우면서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5가 제신들의 추대로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다시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게 된다(BCE 232). 이렇게 대부여의 국통은 북부여로 이어진 것이다.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해모수도 ‘단군’으로 호칭했으므로, 해모수 단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에는, 북부여가 ‘대부여’ 곧 단군 (고)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
그러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3대손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옛날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 하여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의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삼신문화가 전수된 정신사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직계조상과 후손으로서 혈통줄을 타고 계승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는 엄밀히 말해서 동부여이다. 그런데 해부루가 다스렸던 동부여는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의 전한(前漢)과 국경을 맞대고있지도 않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도 없었다. 동부여는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여에 의해 막혀 한나라와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드라마가 상정하는 그 자리에는 사실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 동명성왕 고두막한
 
또 드라마에서 볼 때 전한(前漢)이 매우 강성하여 부여 국내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은 북부여의 국통을 잇게 되는데, BCE 58년 고무서 단군이 죽자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북부여의 6대 단군인 고무서(高無胥)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소서노는 그의 아들 온조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니까 소서노는 드라마에서처럼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본문에서조차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 후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단지 일설로만 연타발의 딸일 가능성을 주를 달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나라의 국통맥을 치졸하게 끊어놓는 것이다. 연타발은 고구려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BCE 200년경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킨 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의 세력에 쫓겨 (고)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의 변방으로 피난을 와 있다가 BCE 194년 번조선 왕조를 강탈하게 된다.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 무제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인해 번조선 위만정권도 막을 내리게 된다.(BCE 108년)
 
 한 무제는 계속해서 번조선 일대와 북부여의 서쪽변방으로 침략을 하는데, 이 때 서압록(요하)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가는 곳마다 격퇴하여 민심을 크게 얻게 된다. 고두막한은 또한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민심과 혈통을 바탕으로 북부여 4대 고우루 단군을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개칭하게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주몽이 아니다. 또한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도 아니다.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인 것이다. 그가 바로 북부여 5대 단군이며 고주몽의 장인이 된 6대 고무서 단군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물론 주몽이 ‘동명부여’(졸본으로 도읍을 옮겼기에 졸본부여라고도 함)를 계승하였으므로,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참고로,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를 이어 그의 동생 해부루가 5대 단군으로 먼저 즉위하였으나, 고두막한에 쫓겨 동쪽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나라를 옮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부여의 시작이다.)
 
 고두막한의 태양 같은 의기와 충의에 힘입어 사실상 한나라는 조선의 고토에서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가 번한의 영토 부근에 한사군(낙랑, 임둔, 현도, 진번)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나 고두막한을 필두로 한 민중의 뜨거운 저항으로 조기에 무너지고 만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제 이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혹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의 맥은 정신사에서…
 
이상의 내용은 주로 한민족의 정통도가사서를 묶어 편집한 『환단고기』 내의 「단군세기」,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런 사서들은 한양조선 시대조차 중국에 사대하는 풍토로 인해 금서로 묶여 있었다. 흔히 강단 사학자들이 기존의 역사 서술구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역사 서술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참역사는 정신사를 알아야 한다. 왜 고주몽 성제는 최초의 연호(年號)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던가? 다물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회복하다’, ‘되물리다’는 뜻을 가진 한민족의 고어(古語)이다. 고주몽 성제는 (고)조선의 역사적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혈통적 정신적인 연계성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역사 기술 풍토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참 역사는 고조선이 나라를 다스렸던 근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한민족 역사는 단순히 청동동검과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유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이 스테인리스 그릇이 아닌 토기에 음식을 해먹었더라도 오히려 오늘날 인간보다 훨씬 더 수승(殊勝)한 인간적 덕성으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사(先史)시대라 하여 반 짐승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도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 <주몽>! 무척 재밌다. 하지만 그 내용이 역사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낸 것은 아니다. <주몽>을 보되, 우리 민족의 참 역사를 재발견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더욱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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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슬픈 장례식의 기록

            - 왕비암살과 알려지지 않은이야기들

            - MBC 시사매거진 2580, 13일(日) 오후 10시 35분 방영

          

                    

1. 칼은 왜 신사에 보관되었는가

        - 일인 자객<명성황후의 시해>를 참회합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자객에 의해 사용된 칼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일본인 자객 토오 가쯔아키는 본인이 사건 당시 사용한 칼을 신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 사진 1>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사용된 토오가쯔아키의 칼, ‘히젠도(肥前刀)라고 불린다.  사진 = 혜문스님


그러나  이칼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연유에 대해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쿠시다 신사에서 수킬로 떨어진 거리에 센신원(節信院)이란 임제종(臨濟宗) 계파의 절이 있었다.  이절에 방문해서야 취재팀은 칼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 2 > 센시원의 전경  사진 = 혜문스님


“ 토오의 친척되는 분과 이절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오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참회하고, 칼을 이곳에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는 칼과 같은 흉기를 맡을 수 없기 때문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신 관음불상을 시주 받았지요.  ”


사찰 관계자인 요시코 여사는 시종 진지한 어조와 미안한 듯한 표정을 한 채 조심스레 설명을 이어 갔다. 

 

 

<사진 3> 토오가 세운 관음상. 명성황후의 얼굴을 참조로 만들었다고 전해짐

            사진 = 혜문스님

 

 

<사진 4> 관음상의 유래를 적은 비석            사진 = 혜문 스님

 

그녀가 안내한 마당 한쪽 석조 관음상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관음상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 있었다.


“1895년 민비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있었다.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죽어간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독지가들이 세웠다 ”


비석은 아무 말없이 회색으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착잡한 심경에 잠겨 있던 우리들에게요시코 여사는 다시금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 저도 왕비암살사건에 대해 공부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왕비를 그렇게 무참하게 ...  토오도 많이 괴로워 했습니다. 노년에는 세상을 등지고 거의 수도승처럼 살았죠.  당시 사건에 연루된 후손들도 가끔 이곳을 찾습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괴로워 했다고 하더군요 ”


 

2. 시해사건이 부른 피의 복수 - 이토오 히로부미의 암살

 

명성황후의 시해에 참가했던 자객들은 이렇게 스스로의 죄과를 뉘우치고 있었다. 근심스런 표정으로 나즉히 나즉히 관음보살상의 내력을 설명하는 일본인 할머니의 얼굴 위로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의 얼굴이 겹쳐졌다. 국가 지상주의와 제국주의 팽창의 야욕이, 이렇게 평범하고 상냥한 한명의 개인을 전쟁의 귀신들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 졌다.


“왕비의 암살이 한국사람들에게 준 슬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쓰노다 후사코 여사도 일본의 왕비암살은 역사의 참극, 복수의 피바람을 불렀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를 저격하며 그랬다는 군요.‘왕비의 복수’를 위해 이토오를 쏘았노라고... 결국 피는 피를 부르는 거겠지요 ”


피는 피를 부른다... 백범 김구의 일대기가 스쳐갔다. 황해도 해주의 평범한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본명)가 파란의 일생에 접어든 이유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인의 만행에 분대한 청년 김창수는 일본인 군인을 타살(打殺)하고, 사형을 언도 받고 감옥에 갇힌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옥한 김창수는 독립운동에 투신, 임시정부 주석에까지 취임하게 되는 것이다.


 

3.지금의 한일 문제를 생각한다

             -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앞에서

 

 

<사진 5>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그는 시해사건의 주모자이자 주동자이다.

            사진 = 혜문스님

 

오카모도 류노스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국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오카모도의 이름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 많다. 그가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음모를 꾸민 사람이고, 대원군을 납치 하고, 사건현장에 훈련대를 동원함으로써  조선의 내분으로 왕비가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려는 계획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은 도쿄 혼몬지라는 곳에 있었다. 이곳은 재일교포 역도산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역도산 무덤으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약간 들어가면, 나무그늘져 음산하고 으시시한 귀퉁이에 오카모도의 무덤이 있었다.

 

 동광(東光) 오카모도 유노스케

 

동광- 평생을 정치공작에 힘써온 그의 일생을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기초를 놓고 있었던 시기.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그 사람이 살아간 문제의식을 그대로  노출시킨 단어였다.

무덤에는 찾아온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누군가 수년전에 향과 초를 피운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자손이 없는 듯  수년째 아무도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의 심장을 찌르겠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고,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오카모도.  국가는 그를 이용해서 조선을 파멸시켰고, 결국 그도 상해에서 궁색하게 죽도록 강요했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가 우국지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이 한몸을 바쳐도 좋다고 , 일본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활활 불태우고 싶다고, 자신에게 스스로 수없이 다짐했을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성공했을때,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민족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4. 명성황후의 시해 그리고 슬픈 역사를 되새기자

         -에조보고서 '나체 만든뒤 국부검사 사실'보고

                             

해방 61주년을 맞은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되돌아 본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놓고 일본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카모도의 무덤앞에서면 섬찟함이 느껴진다. 언제 또 어느 일본의 우국의 지사가 한반도를 차지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가 없다고 주장할 까 두려워서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의 왕비에 대한 기록이 아니 기억 조차  없다.  이번 취재에서 전문을 구한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왕비는 시해후 나체로 국부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평상시 남자들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왕비는, 죽어서 이국의 사내에게 나체로 발가벗겨졌던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전 8시경 고종을 알현하고 시신을 확인한 조선공사 미우라는 경복궁 녹산에서 화장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석유를 붓고 불태워진 명성황후는 시체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고종의 아관파천 등으로  연기되어  2년 2개월동안 치러지지 못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이 슬프고 기나긴 국상이었다.  그 아픈 국상의 기록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왕궁 안에  있다는 웃지못할 비극이 오늘 나로 하여금 무거운 글을 쓰게한다.

 

 

<사진 6>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발인반차도> 현재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

한영우, <조선왕실의궤>에서 사진인용

 

관련카페 http://cafe.daum.net/doorgatemoon

 

 


 

후기  명성황후의 죽음 그리고 슬픈 국상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반환운동을 시작합니다.

 

 지난 7월 7일 조선실록 오대산본이 93년만에 고국으로 되돌아 왔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봉선사 주지 철안)는 2004년 도쿄대가 오대산 사고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약탈의 경위와 소장목록을 조사했다. 그리고 반환운동을 추진하며 기존에 알려졌던 46책 이외, 중종실록 1책이 더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또한 환수위는 1913 오대산 사고 에 소장된 3000여책의 전적중 일본 궁내청왕실도서관에 ‘왕실의궤’오대산본 44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그중에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2년 2개월에 걸친 슬픈 국상의 기록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궁내청 소장 의궤 반환운동의 과정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리고 암살당시 사용된 칼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글은 MBC 2580 취재팀과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이 8월1일부터 8월 4일까지 일본 일정을 정리한 취재기입니다)

[특집 6] 일본, 부여의 아들

                      - 근초고왕, 야마도 일본의 건국시조인가? -


 

                                                              김운회(동양대 교수)


 

 

1. 부여 드라마


  드라마 ‘주몽’의 드라마 사상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부여를 일반인들에게 분명히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그동안 부여는 고구려의 위세에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으나 드라마를 통하여 부여의 많은 이야기들이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해모수와 금와왕의 우정이 드라마 ‘주몽’을 살려 드라마 초반의 인기상승에 큰 역할을 하였다. 어떤 드라마든지 첫 회가 중요한데 정평이 나 있는 한국의 중견 배우 들(전광렬, 허준호)이 이 드라마의 무게를 실어 주었고 그들의 검투 장면도 드라마를 살리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해모수로 분한 배우(허준호)의 카리스마에 반한 많은 시청자들이 해모수를 죽이지 말라고 극심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해모수는 자연사(自然死)할 수 있는 행운도 누리게 되고 자기와 유화부인 사이에 난 아들과도 대면할 수 있는 기적도 연출하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지속적으로 친한족 정책을 수행했던 부여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할수도 있지만 드라마 ‘주몽’의 작가는 금와왕과 주몽의 우정을 부각시킴으로써 범한국인의 일원으로 부여를 힘차게 끌어안고 있다. 물론 해모수와 금와와의 우정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부여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부여는 고조선만큼이나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서의 기록으로 본다면 부여는 고리국(코리국)에서 나왔으며 이 부여는 후일 제2 코리국 즉 고구려의 모태가 된 국가이기도 하다. 북한의 사학자 리준영은 범한국인의 조상으로 알려진 맥족은 고리국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를 연구한 북한의 탁월한 역사학자인 리지린 선생은 이 고리국이 바로 동호(東胡)라고 하고 있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1, 123쪽). 다시 말해서 동호(東胡)는 후일 거란과 몽골의 선조들로서 결국 이 동호로부터 고구려, 북위, 요나라, 금나라, 몽골대제국, 청나라 등이 나왔다는 말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동호는 요하(遼河) 지역으로 고조선의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있는 곳이기도 하고 쥬신족들의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온돌(구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요나라의 사서는 요나라가 단군왕검(텡그리옹군) 식의 통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국가임을 보여준다. 백제를 상징하는 구들, 구드리 등도 구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고 있다([특집4]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줄기차게 동호는 오랑캐의 대명사쯤으로 가르쳐왔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을 때 알타이에서 출발한 유목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한족(漢族)의 정체성이 견고화되는 한나라 이후를 기점으로 이들은 황하에서 현재의 베이징 - 요하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밀려 나간 것이 기원 전후의 사정이므로 이 시기에 요하에 터전을 잡은 나라나 민족이 우리의 뿌리에 가장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①]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

                      (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2. 험난한 부여의 여정 


  부여는 그 연원이 깊은 나라지만 자가 분열로 인해 형성된 고구려와 부족국가 또는 부족 연맹체 단계에 있던 다른 쥬신족들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음으로써 AD 2~3세기 이후에는 거의 만성적인 국가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부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친한족 정책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동 지방(남부여), 태백산지역(장백산 : 동부여), 반도 남부(반도부여),  일본 열도(열도부여) 등으로 끊임없이 보다 안전한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쉽게 말해서 부여의 분국(分國)이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남부여를 바탕으로 반도부여(백제)를 건설했겠고, 반도부여(백제)를 근거로 하여 열도부여(야마도 : 일본)를 건설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림 ②] 부여의 영역과 이동 


  부여는 AD 3세기 초 중엽에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그 주요 세력들이 남하하여 반도부여의 기초를 세우고(부여계의 2차 남하) 다시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시기에는 만주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지고(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102쪽), 백제는 한반도에서 왕성한 정복활동을 전개되고 있다(전라도, 낙동강, 황해도).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시기에 벡제의 근초고왕은 20여 년간 잠적하는데 이 시기(349~363)에 일본에서도 활발한 정복사업이 시작되고 있다(부여계의 3차 남하).


  백제 관련 연구자들은 “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부여 세력이 반도로 이전해온 것일 뿐이다.


  더욱 주목할만한 일은 이 시기(4세기)를 즈음하여 7세기 초까지의 일본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분(古墳)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야마도 정부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고 미마나(任那)라는 식민지 운영을 시작했다고 하고 있고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비족이 진씨(眞氏)가 되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진씨(眞氏)가 일본의 황족(皇族)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재위 : 346~375)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백제는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간 시기(『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와 일치하고 있다. 즉 북만주 지역의 부여는 거의 붕괴직전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여의 주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부여계 3차 남하).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무덤양식의 변화가 있다. 서울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즉 4세기 후반에 만주지역의 무덤양식이 느닷없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사를 연구한 홍원탁선생에 따르면 백제의 왕위는 166-346년 기간 동안 4대 개루왕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면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고 고이 계열(부여계의 2차 남하 세력)의 마지막 왕인 계(契)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근초고왕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진서(晉書)』를 포함한 여러 중국 사서들에서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여영(餘暎), 전지왕(典支王)은 여비(餘毗), 반유왕(畔有王)은 여경(餘慶), 개로왕(蓋鹵王)은 여융(餘隆), 무령왕(武寧王)은 여명(餘明), 성왕(聖王)은 여창(餘昌)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 29대 무왕(武王)부터는 부여장(扶餘璋)으로 부여(扶餘)씨로 기록하고 있다(『수서(隋書)』『당서(唐書)』).

 

  참고로 『삼국유사(북부여)』의 기록에는 “古記(고기)에 이르되 전한서에 宣帝(선제) 신작 3년 임술 사월 팔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게지역임]에 내려와서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 : sun)로 씨(氏)를 삼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집3], [특집4] 참고).  

 

 

3. 일본, 부여의 아들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이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일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면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오우진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처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으로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이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한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따라서 오늘날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일본인들이 야마도 정신(일본 정신) 또는 야마도의 혼(魂)이라고 하는 그 정신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정벌해서 조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진구황후가 활약한 시기를 비교해보면 다른 사서에서는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이라다께 목라근자 등을 보내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업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진구황후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백제전문가 이도학교수에 의하면, 『일본서기』에 근초고왕 당시 전라도 지역에 왜(倭)의 군대가 활동한 것(『日本書紀』神功 49年)도 사실은 근초고왕이 주도한 것이다고 한다. 결국 근초고왕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군대가 이동한 것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이 정복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져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보병전(步兵戰)으로는 불가능하고 대규모의 북방 기병(騎兵)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남 호남 등의 지역은 넓은 평원이 있어 기병전(騎兵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근초고왕의 업적으로 추정되는 일을 한 사람인 진구황후가 실존인물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문헌외에 진구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인물로는 3세기 왜 여왕 히미코인데, 히미코여왕의 업적과 진구황후의 업적의 실질적인 공통성은 하나도 없다. 히미코 여왕은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갈등이 심한 각 부족들간의 화합과 조화를 이끌어 내었던 영명한 군주였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39년, 40년, 43년의 기사는 히미코의 기사로 대체해두고 있다. 그러면 히미코를 진구황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정작 히미코는 진구황후와는 공통성이 없어 이 기록들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왕의 업적을 끌어다 놓은 것이다.


  필자는 이 진구황후는 근초고왕 + 히미코 + 사이메이천황 등의 모습을 하나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은 백제 구원을 위한 국가적 사업을 하다가 중도에 서거한 여자 천황이다. 일본인들이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사이메이 천황을 진구황후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초고왕 또는 그의 처족인 부여의 주류 씨족(진씨)이 가야계와 연합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여 고대 일본의 야마도 왕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구당서』에서는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백제와 일본의 기본 통치세력은 남부여계(南扶餘系)이고 이들 남부여계 씨족들은 결혼(結婚)을 통해 더욱 관계가 공고화된다.



             [그림 ③] 절대권력의 상징 오우진 능


  일본의 저명한 사가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오우진 (호무다) 이전의 천황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진무(神武)와 오오진(應神)은 동일인이라고 보는데 동일인을 굳이 모자의 관계로 둘로 나눈 이유는 당시 오오진이 너무 잔인하게 열도를 정벌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는 의도라고도 한다.


  미즈노유우(水野 祐) 교수에 따르면, 오우진․닌토쿠(오우진의 아드님) 왕조(카와치왕조)는 외래 민족의 세력으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왕조로 기본적으로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부여)으로 대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대륙의 사정에 대해서도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 1978)].

 

  그런데 오우진 천황이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眞氏)라는 것이다. 야마도 조정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오우진계의 씨족 이름이 진[眞, 眞人(마히토 : マヒト)]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백제의 친왕(親王)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신찬성씨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던 사람들은 오우진계의 천황들의 성은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라고 한다[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지문사 : 1982) 204쪽]. 특히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들은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함으로써 진씨 왕후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이기백․이기동『韓國史講座Ⅰ : 古代篇 』(일조각 : 1983) 37쪽].

 

  참고로 백제의 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계보(系譜)를 참고로 살펴보자. 이 그림은 2십년 이상 백제와 일본의 왕가 계보를 연구한 홍윤기 선생(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견해이다. 

 


       [표1] 백제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관계도
            (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61쪽 재구성) 


  [표1] 의 계보 표를 보면 개로왕(蓋鹵王 : ?~475)의 아드님이신 곤지왕자(昆支王子)는 두 손자를 한 쪽은 백제, 한 쪽은 일본에서 모두 최고 권력자로 등극시키고 있다. 그런데 곤지왕자가 활약하던 때는 장수왕의 침입으로 부왕(개로왕)이 세상을 떠나는 등 백제가 “회복 불능” 한 상태에 빠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근초고왕 때에도 상황이 비슷한데 근초고왕은 백제(반도부여)를 통치하고 근초고왕 자신 또는 왕비족(王妃族)인 진씨계(眞氏系)는 일본(열도부여)을 경영하였듯이, 개로왕의 죽음 이후도 곤지왕자의 가계를 중심으로 열도부여와 반도부여는 하나의 왕조를 형성하게 된다. 개로왕은 『삼국사기』에는 여러모로 나쁘게 묘사되어있지만  실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안간힘을 쓴 분이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백제와 일본의 왕가는 너무 얽히고설켜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를 정도로 친족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차라리 하나의 왕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반도부여의 성왕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가장 헌신한 분으로  열도부여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하여 최고의 존칭으로 부르고 있다. 마치 동명성왕을 부르는 듯하다.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테이칸 기시키(貞觀儀式)』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貞觀儀式』「園倂韓神祭」).”고 하는데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오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聖明王) 즉 남부여(백제)의 대표적 성군으로 부여의 부활을 꿈꾸다가 산화(散華)한 성왕(聖王)이다. 일본인들은 성명왕(聖明王 : 성왕)을 이마키노가미(今木神)으로 높혀 부른다. 바로 쥬신(Jüsin)의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반도부여의 성왕(백제 성왕)은 일본의 국신(國神)이다. (상세한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제1권 일본신들의 고향 참고)

  이러한 상황은 고고학적 발굴으로도 증명이 된다. 일본 고분문화의 특성은 반도부여가 한반도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AD 4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급격히 바뀌고 있으며 그 고분의 성격이 쥬신 즉 만주와 몽골 지역 등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실용적(實用的)이며 군사적(軍事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근초고왕이 백제를 지배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고 특히 근초고왕의 행적은 20여 년이 나타나지를 않아서 일본 열도의 정벌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를 참고할 것). 더욱 이상한 일은 이 4세기 후반에 대한 일본 역사의 기록이 없어 흔히 ‘신비의 4세기’라고 한다. 일본의 사가들에게 이 시대의 역사는 말못할 사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그것은 반도부여(백제)의 정치사적 변화와 그대로 일치한다.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의 정치적 교환관계(交換關係)가 단순히 본국(本國) - 지방정권(地方政權)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와 같은 정도의 혈맹적인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연맹왕국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는 범부여 연합국가(USB : United States of Buyou)라는 것이다.


  두 나라는 국가원수의 교체에 있어서도 서로 관여하는 등 거의 한나라 수준의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정치적인 일체성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백제의 진사왕이다. 또한 백제 - 가야 - 일본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실제 기록들이 『일본서기』에는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긴메이(欽明 : 531~71) 천황 2년에 백제의 성명왕(523~554 : 백제 성왕)이 가야에서 온 여러 사람들에게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의문스러운 점은 백제의 무왕이나 성왕은 일본의 죠메이천황(舒明天皇 : 628-641) 및 긴메이천황(欽命天皇)과 동일인이라는 여러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小林惠子『二つの顔の大王』(文藝春秋 : 1991)].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연합국가 범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다. AD 4세기에서 AD 7세기 반도부여(백제)의 멸망 때까지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는 연맹국가 이상 또는 같은 나라 수준이 아니면 곤란할 정도의 생산요소(production factors)나 국가자원(national resources)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하나하라(埴原和郎)는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渡來人)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 지방의 대부분 사람들이 도래인(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다.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까지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東京大學人類學雜紙 1987年 英文版「古代日本 移住者 數 推定」). 당시 교통수단이나 인구의 수준을 감안해 보면 이는 국가적인 이동에 해당한다. 


  AD 5세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반도부여(백제)는 대장장이․토목공사전문가․양조업자․의복재단사 등의 전문직 사람들을 대거 보냈으며 403년에는 궁월군[弓月君 : 하다씨(秦氏) 씨족의 시조]이 무려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 아지사주(阿知使主 : 아야족의 시조)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왔으며 463년(유략쿠 7년)에 대규모의 기능공들이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등 반도부여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오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앞의 책을 참고할 것)


  뿐만 아니라 반도부여(백제)에서 열도부여(일본)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반도부여의 수준에 준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국가적 동일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즉 당시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인원이 일본으로 갔는데 이들은 백제에서 가졌던 지위에 따라 일정한 직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은 백제왕(百濟王)이란 호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일본 조정의 고위인사들이었다(『續日本記』) 귀족들의 경우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일본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략 60여명 정도의 백제 유민이 일본의 조정에 참여했으며 일본의 『고사기(古事記)』(712)나 『일본서기(日本書紀)』(681~620)의 편찬에도 깊이 개입한다.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범주에 둘 수 있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할 당시 반도부여(백제)를 방어하고 지키려는 일본의 의지가 하나의 나라가 아니면 곤란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일본은 마치 국운(國運)을 걸고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원정 해군을 지휘했으며 나카 왕자는 5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백제를 원조하게 했으며 풍왕자는 5천명이 넘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6명의 장군이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로 갔으며 당시 백제 부흥운동을 위해 파견된 백제의 좌평 복신(福信)에게는 화살 십만 척, 실 5백 근, 솜 1천 근, 피륙 1천단, 다룬 가죽 1천 장, 종자 벼 3천 석이 주어졌고 다시 피륙 3백단을 백제왕(풍)에 주었다(『日本書紀』「天智天皇」). 이러한 일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제․일본 연합군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패배하여 일본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三國史記』「百濟本紀」.).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서기』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日本書紀』「齊明天皇」).”라고 하고 있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 서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



 

            [그림 ④] 반도부여의 슬픈 유적 : 백마강과 낙화암 

    

  이상의 논의들을 토대로 본다면 일본은 바로 반도부여를 이은 부여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백제와 일본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부여(扶餘)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가 있다.

 

 

 


참고 『대쥬신을 찾아서』제1권

        12.일본 신들의 고향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18. 왜 한국인들의 이름 -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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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국  가

 

---------------------

구석기 시대

--------

 

 

---------------------

신석기 시대

--------

 

2500

고조선(단군조선)
BC 2333 ~ BC238

 

 

2000

청동기 시대

 

1000

 

500

철기 시대

 

400

 

300

 

 

200

 

100

북부여 BC239-BC58

 

BC 50

신라
BC 57~935

 

---------

---------

--------

 

0

---------

고구려
BC 37~668
신라에 멸망

백제
BC 18~660
신라에 멸망

 

AD 50

가락(가야)
42~532
신라에 귀순

100

200

300

400

500

600

 

650

700

통 일  신 라
고려에 귀순

발해
698~926
거란에 멸망

800

850

900

 

 

태봉(후고구려) 890~918
고려에 멸망

후백제
892~935
고려에 멸망

950

 

1000

고려
918~1392
조선에 멸망

 

1100

1200

1300

1400

조선 1392 ~ 1910

 

1500

1600

1700

1800

1900

1910

일제 강점기 1910 ~ 1945

1945

1945

미군 군정 1945 ~ 1948

1948

대한민국 1948 ~ 현재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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