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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본 글은 오소운 목사가 작성한 글을 스크랩하여 일부 재구성함. 선비]
외국 학자들이 보는 동이족(東夷族) 글 : 오소운 목사
▶ 들어가는 말 ◀
지금의 중국 중심부, 이 지역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중심에 있으면서 동아시아를 지배한 어질고, 예절바르고, 창의력이 넘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동이족(東夷族)」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도 동이족이요,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羲和子)는 물론,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도 동이족이다.
동양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최고의 성군(聖君)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도 동이족이요,
최초로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무장하여 박치기 전법으로 유명한 치우(蚩尤) 천황도 동이족이요,
갑골문자, 상형문자, 표의문자, 한문자(漢文字, 소위 漢文)를 만든 것도 동이족이요,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와 숙제(叔弟)까지도 동이족이다.
이 지도는 우리 조상인 동이의 나라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가
아시아의 동방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다.
이에 놀란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것으로 동이족이 한(韓)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자기네 조상이라고,「왜놈의 역사왜곡」보다 더한「뙤놈의 역사왜곡」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랑잎으로 해를 가리는 식의 치졸한 방식으로 저네들이 역사왜곡을 한다 해도, 자기들의 추악한 욕심만 드러낼 뿐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세계 석학들의 논문 중에서 동이가 우리민족의 조상임을 고증한 글과 그들의 업적을 모아 여기 실림으로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바이다.
(1) 서량지(徐亮之) 교수 :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
“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1) 장개석(蔣介石) :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은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고향이 옛날 백제(*대륙백제) 땅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진 설명> 왼쪽이 장개석, 가운데가 그의 부인 송미령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2-2) 임어당(林語堂):
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여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20세기 최대 학자 임어당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박사 .
▶ 안호상 :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에 문제가 많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 임어당 :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안을 당한 안호상 박사는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史記) (五帝本紀).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그는 이런 글도 썼다.
“4천 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묘족(苗族)은 오늘날 현재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묘족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치우천황을 기리는 정통 구전가요가 올라 있어 원문과 함께 번역해 실린다.
蚩尤挽歌 ( 苗族 傳統 口傳 歌謠 묘족 전통 구전 가요 * 오 소운 역)
千古奇才横空贤,천고기재 횡공현 천고기재 영웅이신 치우 천황을
可堪并论炎皇間。가담병론 염황간 염제씨나 황제씨와 어찌 비하랴
五兵刑法君始点 오병형법 군시점 5병기와 형법까지 친히 만드사
九黎生气冲云天。구려생기 충운천 구려백성 사기높여 충천케 했네
席卷中原华夏联,석권중원 하화련 중원땅의 하화연맹 쳐서 이기니
血染江河五千年。혈염강하 오천년 오천년의 강의물이 피로 흐르네
英名不因涿鹿败,영명불인 탁록패 탁록에서 패한것이 원인 아님은
老黑石山百花宣。노흑석산 백화선 흑석산의 고운꽃이 증언 하누나
예기(禮記)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묘족은 구려(九黎)의 후예다. 구려를 묘(苗) 민족의 선조로 삼고 있다.”
; 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 [禮記]
(4) 임혜상(林惠詳) 교수 :
홍콩대학의 임혜상(林惠詳) 교수는《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맹자가 말하기를「순(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舜)임금은 은(殷)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興起)하였다." (흥기 ; 흥하여 일어나다)
(5)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 :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그의 저서《고사변(古史辯), 192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조(玄鳥)는 은(殷)나라 사람과 동이(東夷)의 조상신이다.”; 玄鳥是殷人東夷的祖先神.
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小昊), 그리고 설(契)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6) 대만학자 노간(勞幹) :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 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 만일 이(夷)가 먼저 문화를 이루어 앞서 나갔다면, 이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사람 인(人)자는 전 인류적인 이름에 들 것이다.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려 쓴 것이다.”
(7) 중국학자 필장박(畢長樸) :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而係遠始于寒的北方.
(8) 일본학자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9)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 :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0) 소련의 역사학자 시로코고르프 :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오 소운 목사 : 대륙을 지배했던 우리민족의 역사가 분명 존재 하건만 백제가 대륙을 지배했다고 지나족 학자가 증언해왔건만
이 모든 사실에 눈감고 귀닫고 반도사관만 짖어대는 사학자들
치우천황은 있지도 않는 인물드립을 치다가 실존 인물로 밝혀지자 동이족의 원래의 뜻이 지나족이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르던 칭호였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 됐으니 우리는 동이족이 아니다 동이족은 우리민족이 아니다 드립 신채호 선생을 과대망상증 환자 쇼비즘이라고 떠들던 것처럼 우리민족이 대륙의 창대한 역사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외국학자들을 환빠라고 집단 정신병자들 이라고 말해봐 강단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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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자(선비) : 위 퍼온 글을 탐독하고 원작성자의 글 전체를 토대로 일부 재편집(첨언) 하면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 위의 글이 사실이라면 이는 너무 충격적이다.
-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원작성자의 취지를 공감하지만 민족의 자긍심 고취 및 방법을 좀 더 세련되게 하여야 한다.
- 본인은 전문가도 아니고 실증적 증거를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위 글은 이미 오랜 기간 다양한 형태로 학계, 방송, 언론, 인터넷에서 거론되었던 내용이라 개인적으로는 위 글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는 부분에 비중을 더 갖고 있다. 따라서 국가, 민족의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 확립을 위해서 정부차원에서 사실 확인에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 역사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고서적(古書籍)의 수집 확보 필요함.
- 국내수집 : 개인, 기관 소장 고서적 수집.
*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다량 보관, 공개 거부하고 있음
* 사찰, 서원, 향교, 고택, 고문서 수집상 협조로 사본 확보
- 해외수집 : 외교적 노력으로 수집.
* 일본 황실소장 고서 [일제식민시대 약30만권 수탈 추정]
* 중국/대만 소장 고서 [진실을 알기에 역사 날조 감행]
* 서양 소장 고서 [비단길 교역시대, 식민제국시대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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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슬픈 장례식의 기록
- 왕비암살과 알려지지 않은이야기들
- MBC 시사매거진 2580, 13일(日) 오후 10시 35분 방영
1. 칼은 왜 신사에 보관되었는가
- 일인 자객<명성황후의 시해>를 참회합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자객에 의해 사용된 칼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일본인 자객 토오 가쯔아키는 본인이 사건 당시 사용한 칼을 신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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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사용된 토오가쯔아키의 칼, ‘히젠도(肥前刀)라고 불린다. 사진 = 혜문스님
그러나 이칼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연유에 대해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쿠시다 신사에서 수킬로 떨어진 거리에 센신원(節信院)이란 임제종(臨濟宗) 계파의 절이 있었다. 이절에 방문해서야 취재팀은 칼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 2 > 센시원의 전경 사진 = 혜문스님
“ 토오의 친척되는 분과 이절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오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참회하고, 칼을 이곳에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는 칼과 같은 흉기를 맡을 수 없기 때문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신 관음불상을 시주 받았지요. ”
사찰 관계자인 요시코 여사는 시종 진지한 어조와 미안한 듯한 표정을 한 채 조심스레 설명을 이어 갔다.
<사진 3> 토오가 세운 관음상. 명성황후의 얼굴을 참조로 만들었다고 전해짐
사진 = 혜문스님
<사진
4> 관음상의 유래를 적은 비석
사진 = 혜문 스님
그녀가 안내한 마당 한쪽 석조 관음상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관음상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 있었다.
“1895년 민비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있었다.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죽어간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독지가들이 세웠다 ”
비석은 아무 말없이 회색으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착잡한 심경에 잠겨 있던 우리들에게요시코 여사는 다시금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 저도 왕비암살사건에 대해 공부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왕비를 그렇게 무참하게 ... 토오도 많이 괴로워 했습니다. 노년에는 세상을 등지고 거의 수도승처럼 살았죠. 당시 사건에 연루된 후손들도 가끔 이곳을 찾습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괴로워 했다고 하더군요 ”
2. 시해사건이 부른 피의 복수 - 이토오 히로부미의 암살
명성황후의 시해에 참가했던 자객들은 이렇게 스스로의 죄과를 뉘우치고 있었다. 근심스런 표정으로 나즉히 나즉히 관음보살상의 내력을 설명하는 일본인 할머니의 얼굴 위로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의 얼굴이 겹쳐졌다. 국가 지상주의와 제국주의 팽창의 야욕이, 이렇게 평범하고 상냥한 한명의 개인을 전쟁의 귀신들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 졌다.
“왕비의 암살이 한국사람들에게 준 슬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쓰노다 후사코 여사도 일본의 왕비암살은 역사의 참극, 복수의 피바람을 불렀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를 저격하며 그랬다는 군요.‘왕비의 복수’를 위해 이토오를 쏘았노라고... 결국 피는 피를 부르는 거겠지요 ”
피는 피를 부른다... 백범 김구의 일대기가 스쳐갔다. 황해도 해주의 평범한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본명)가 파란의 일생에 접어든 이유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인의 만행에 분대한 청년 김창수는 일본인 군인을 타살(打殺)하고, 사형을 언도 받고 감옥에 갇힌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옥한 김창수는 독립운동에 투신, 임시정부 주석에까지 취임하게 되는 것이다.
3.지금의 한일 문제를 생각한다
-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앞에서
<사진 5>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그는 시해사건의 주모자이자 주동자이다.
사진 = 혜문스님
오카모도 류노스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국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오카모도의 이름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 많다. 그가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음모를 꾸민 사람이고, 대원군을 납치 하고, 사건현장에 훈련대를 동원함으로써 조선의 내분으로 왕비가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려는 계획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은 도쿄 혼몬지라는 곳에 있었다. 이곳은 재일교포 역도산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역도산 무덤으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약간 들어가면, 나무그늘져 음산하고 으시시한 귀퉁이에 오카모도의 무덤이 있었다.
동광(東光) 오카모도 유노스케
동광- 평생을 정치공작에 힘써온 그의 일생을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기초를 놓고 있었던 시기.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그 사람이 살아간 문제의식을 그대로 노출시킨 단어였다.
무덤에는 찾아온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누군가 수년전에 향과 초를 피운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자손이 없는 듯 수년째 아무도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의 심장을 찌르겠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고,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오카모도. 국가는 그를 이용해서 조선을 파멸시켰고, 결국 그도 상해에서 궁색하게 죽도록 강요했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가 우국지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이 한몸을 바쳐도 좋다고 , 일본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활활 불태우고 싶다고, 자신에게 스스로 수없이 다짐했을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성공했을때,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민족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4. 명성황후의 시해 그리고 슬픈 역사를 되새기자
-에조보고서 '나체 만든뒤 국부검사 사실'보고
해방 61주년을 맞은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되돌아 본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놓고 일본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카모도의 무덤앞에서면 섬찟함이 느껴진다. 언제 또 어느 일본의 우국의 지사가 한반도를 차지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가 없다고 주장할 까 두려워서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의 왕비에 대한 기록이 아니 기억 조차 없다. 이번 취재에서 전문을 구한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왕비는 시해후 나체로 국부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평상시 남자들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왕비는, 죽어서 이국의 사내에게 나체로 발가벗겨졌던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전 8시경 고종을 알현하고 시신을 확인한 조선공사 미우라는 경복궁 녹산에서 화장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석유를 붓고 불태워진 명성황후는 시체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고종의 아관파천 등으로 연기되어 2년 2개월동안 치러지지 못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이 슬프고 기나긴 국상이었다. 그 아픈 국상의 기록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왕궁 안에 있다는 웃지못할 비극이 오늘 나로 하여금 무거운 글을 쓰게한다.
<사진 6>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발인반차도> 현재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
한영우, <조선왕실의궤>에서 사진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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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명성황후의 죽음 그리고 슬픈 국상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반환운동을 시작합니다.
지난 7월 7일 조선실록 오대산본이 93년만에 고국으로 되돌아 왔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봉선사 주지 철안)는 2004년 도쿄대가 오대산 사고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약탈의 경위와 소장목록을 조사했다. 그리고 반환운동을 추진하며 기존에 알려졌던 46책 이외, 중종실록 1책이 더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또한 환수위는 1913 오대산 사고 에 소장된 3000여책의 전적중 일본 궁내청왕실도서관에 ‘왕실의궤’오대산본 44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그중에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2년 2개월에 걸친 슬픈 국상의 기록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궁내청 소장 의궤 반환운동의 과정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리고 암살당시 사용된 칼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글은 MBC 2580 취재팀과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이 8월1일부터 8월 4일까지 일본 일정을 정리한 취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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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6] 일본, 부여의 아들
- 근초고왕, 야마도 일본의 건국시조인가? -
김운회(동양대 교수)
1. 부여 드라마
드라마 ‘주몽’의 드라마 사상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부여를 일반인들에게 분명히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그동안 부여는 고구려의 위세에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으나 드라마를 통하여 부여의 많은
이야기들이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해모수와 금와왕의 우정이 드라마 ‘주몽’을 살려 드라마 초반의 인기상승에 큰 역할을 하였다. 어떤 드라마든지 첫 회가 중요한데 정평이 나 있는 한국의 중견 배우 들(전광렬, 허준호)이 이 드라마의 무게를 실어 주었고 그들의 검투 장면도 드라마를 살리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해모수로 분한 배우(허준호)의 카리스마에 반한 많은 시청자들이 해모수를 죽이지 말라고 극심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해모수는 자연사(自然死)할 수 있는 행운도 누리게 되고 자기와 유화부인 사이에 난 아들과도 대면할 수 있는 기적도 연출하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지속적으로 친한족 정책을 수행했던 부여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할수도 있지만 드라마 ‘주몽’의 작가는 금와왕과 주몽의 우정을 부각시킴으로써 범한국인의 일원으로 부여를 힘차게 끌어안고 있다. 물론 해모수와 금와와의 우정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부여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부여는 고조선만큼이나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서의 기록으로 본다면 부여는 고리국(코리국)에서 나왔으며 이 부여는 후일 제2 코리국 즉 고구려의 모태가 된 국가이기도 하다. 북한의 사학자 리준영은 범한국인의 조상으로 알려진 맥족은 고리국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를 연구한 북한의 탁월한 역사학자인 리지린 선생은 이 고리국이 바로 동호(東胡)라고 하고 있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1, 123쪽). 다시 말해서 동호(東胡)는 후일 거란과 몽골의 선조들로서 결국 이 동호로부터 고구려, 북위, 요나라, 금나라, 몽골대제국, 청나라 등이 나왔다는 말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동호는 요하(遼河) 지역으로 고조선의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있는 곳이기도 하고 쥬신족들의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온돌(구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요나라의 사서는 요나라가 단군왕검(텡그리옹군) 식의 통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국가임을 보여준다. 백제를 상징하는 구들, 구드리 등도 구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고 있다([특집4]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줄기차게 동호는 오랑캐의 대명사쯤으로 가르쳐왔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을 때 알타이에서 출발한 유목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한족(漢族)의 정체성이 견고화되는 한나라 이후를 기점으로 이들은 황하에서 현재의 베이징 - 요하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밀려 나간 것이 기원 전후의 사정이므로 이 시기에 요하에 터전을 잡은 나라나 민족이 우리의 뿌리에 가장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①]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
(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2. 험난한 부여의 여정
부여는 그 연원이 깊은 나라지만 자가 분열로 인해 형성된 고구려와 부족국가 또는 부족 연맹체 단계에 있던 다른 쥬신족들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음으로써 AD 2~3세기 이후에는 거의 만성적인 국가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부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친한족 정책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동 지방(남부여), 태백산지역(장백산 : 동부여), 반도 남부(반도부여), 일본 열도(열도부여) 등으로 끊임없이 보다 안전한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쉽게 말해서 부여의 분국(分國)이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남부여를 바탕으로 반도부여(백제)를 건설했겠고, 반도부여(백제)를 근거로 하여 열도부여(야마도 : 일본)를 건설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림 ②] 부여의 영역과 이동
부여는 AD 3세기 초 중엽에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그 주요 세력들이 남하하여 반도부여의 기초를 세우고(부여계의 2차 남하) 다시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시기에는 만주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지고(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102쪽), 백제는 한반도에서 왕성한 정복활동을 전개되고 있다(전라도, 낙동강, 황해도).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시기에 벡제의 근초고왕은 20여 년간 잠적하는데 이 시기(349~363)에 일본에서도 활발한 정복사업이 시작되고 있다(부여계의 3차 남하).
백제 관련 연구자들은 “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부여 세력이 반도로 이전해온 것일 뿐이다.
더욱 주목할만한 일은 이 시기(4세기)를 즈음하여 7세기 초까지의 일본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분(古墳)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야마도 정부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고 미마나(任那)라는 식민지 운영을 시작했다고 하고 있고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비족이 진씨(眞氏)가 되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진씨(眞氏)가 일본의 황족(皇族)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재위 : 346~375)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백제는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간 시기(『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와 일치하고 있다. 즉 북만주 지역의 부여는 거의 붕괴직전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여의 주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부여계 3차 남하).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무덤양식의 변화가 있다. 서울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즉 4세기 후반에 만주지역의 무덤양식이 느닷없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사를 연구한 홍원탁선생에 따르면 백제의 왕위는 166-346년 기간 동안 4대 개루왕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면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고 고이 계열(부여계의 2차 남하 세력)의 마지막 왕인 계(契)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근초고왕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진서(晉書)』를 포함한 여러 중국 사서들에서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여영(餘暎), 전지왕(典支王)은 여비(餘毗), 반유왕(畔有王)은 여경(餘慶), 개로왕(蓋鹵王)은 여융(餘隆), 무령왕(武寧王)은 여명(餘明), 성왕(聖王)은 여창(餘昌)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 29대 무왕(武王)부터는 부여장(扶餘璋)으로 부여(扶餘)씨로 기록하고 있다(『수서(隋書)』『당서(唐書)』).
참고로 『삼국유사(북부여)』의 기록에는 “古記(고기)에 이르되 전한서에 宣帝(선제) 신작 3년 임술 사월 팔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게지역임]에 내려와서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 : sun)로 씨(氏)를 삼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집3], [특집4] 참고).
3. 일본, 부여의 아들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이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일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면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오우진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처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으로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이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한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따라서 오늘날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일본인들이 야마도 정신(일본 정신) 또는 야마도의 혼(魂)이라고 하는 그 정신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정벌해서 조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진구황후가 활약한 시기를 비교해보면 다른 사서에서는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이라다께 목라근자 등을 보내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업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진구황후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백제전문가 이도학교수에 의하면, 『일본서기』에 근초고왕 당시 전라도 지역에 왜(倭)의 군대가 활동한 것(『日本書紀』神功 49年)도 사실은 근초고왕이 주도한 것이다고 한다. 결국 근초고왕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군대가 이동한 것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이 정복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져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보병전(步兵戰)으로는 불가능하고 대규모의 북방 기병(騎兵)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남 호남 등의 지역은 넓은 평원이 있어 기병전(騎兵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근초고왕의 업적으로 추정되는 일을 한 사람인 진구황후가 실존인물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문헌외에 진구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인물로는 3세기 왜 여왕 히미코인데, 히미코여왕의 업적과 진구황후의 업적의 실질적인 공통성은 하나도 없다. 히미코 여왕은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갈등이 심한 각 부족들간의 화합과 조화를 이끌어 내었던 영명한 군주였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39년, 40년, 43년의 기사는 히미코의 기사로 대체해두고 있다. 그러면 히미코를 진구황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정작 히미코는 진구황후와는 공통성이 없어 이 기록들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왕의 업적을 끌어다 놓은 것이다.
필자는 이 진구황후는 근초고왕 + 히미코 + 사이메이천황 등의 모습을 하나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은 백제 구원을 위한 국가적 사업을 하다가 중도에 서거한 여자 천황이다. 일본인들이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사이메이 천황을 진구황후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초고왕 또는 그의 처족인 부여의 주류 씨족(진씨)이 가야계와 연합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여 고대 일본의 야마도 왕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구당서』에서는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백제와 일본의 기본 통치세력은 남부여계(南扶餘系)이고 이들 남부여계 씨족들은 결혼(結婚)을 통해 더욱 관계가 공고화된다.
[그림 ③] 절대권력의 상징 오우진 능
일본의 저명한 사가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오우진 (호무다) 이전의 천황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진무(神武)와 오오진(應神)은 동일인이라고 보는데 동일인을 굳이 모자의 관계로 둘로 나눈 이유는 당시 오오진이 너무 잔인하게 열도를 정벌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는 의도라고도 한다.
미즈노유우(水野 祐) 교수에 따르면, 오우진․닌토쿠(오우진의 아드님) 왕조(카와치왕조)는 외래 민족의 세력으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왕조로 기본적으로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부여)으로 대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대륙의 사정에 대해서도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 1978)].
그런데 오우진 천황이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眞氏)라는 것이다. 야마도 조정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오우진계의 씨족 이름이 진[眞, 眞人(마히토 : マヒト)]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백제의 친왕(親王)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신찬성씨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던 사람들은 오우진계의 천황들의 성은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라고 한다[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지문사 : 1982) 204쪽]. 특히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들은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함으로써 진씨 왕후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이기백․이기동『韓國史講座Ⅰ : 古代篇 』(일조각 : 1983) 37쪽].
참고로 백제의 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계보(系譜)를 참고로 살펴보자. 이 그림은 2십년 이상 백제와 일본의 왕가 계보를 연구한 홍윤기 선생(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견해이다.
[표1] 백제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관계도
(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61쪽 재구성)
[표1] 의 계보 표를 보면 개로왕(蓋鹵王 : ?~475)의 아드님이신 곤지왕자(昆支王子)는 두 손자를 한 쪽은 백제, 한 쪽은 일본에서 모두
최고 권력자로 등극시키고 있다. 그런데 곤지왕자가 활약하던 때는 장수왕의 침입으로 부왕(개로왕)이 세상을 떠나는 등 백제가 “회복
불능” 한 상태에 빠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근초고왕 때에도 상황이 비슷한데 근초고왕은 백제(반도부여)를 통치하고 근초고왕 자신
또는 왕비족(王妃族)인 진씨계(眞氏系)는 일본(열도부여)을 경영하였듯이, 개로왕의 죽음 이후도 곤지왕자의 가계를 중심으로 열도부여와 반도부여는 하나의 왕조를 형성하게
된다. 개로왕은 『삼국사기』에는 여러모로 나쁘게 묘사되어있지만 실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안간힘을 쓴
분이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백제와 일본의 왕가는 너무
얽히고설켜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를 정도로 친족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차라리 하나의 왕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반도부여의 성왕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가장 헌신한 분으로
열도부여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하여 최고의 존칭으로 부르고 있다. 마치 동명성왕을 부르는 듯하다.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테이칸 기시키(貞觀儀式)』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貞觀儀式』「園倂韓神祭」).”고 하는데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오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聖明王) 즉 남부여(백제)의 대표적 성군으로 부여의 부활을 꿈꾸다가 산화(散華)한 성왕(聖王)이다. 일본인들은 성명왕(聖明王 : 성왕)을 이마키노가미(今木神)으로 높혀 부른다. 바로 쥬신(Jüsin)의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반도부여의 성왕(백제 성왕)은 일본의 국신(國神)이다. (상세한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제1권 일본신들의 고향 참고)
이러한 상황은 고고학적 발굴으로도 증명이 된다. 일본 고분문화의 특성은 반도부여가 한반도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AD 4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급격히 바뀌고 있으며 그 고분의 성격이 쥬신 즉 만주와 몽골 지역 등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실용적(實用的)이며 군사적(軍事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근초고왕이 백제를 지배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고 특히 근초고왕의 행적은 20여 년이 나타나지를 않아서 일본 열도의 정벌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를 참고할 것). 더욱 이상한 일은 이 4세기 후반에 대한 일본 역사의 기록이 없어 흔히 ‘신비의 4세기’라고 한다. 일본의 사가들에게 이 시대의 역사는 말못할 사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그것은 반도부여(백제)의 정치사적 변화와 그대로 일치한다.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의 정치적 교환관계(交換關係)가 단순히 본국(本國) - 지방정권(地方政權)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와 같은 정도의 혈맹적인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연맹왕국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는 범부여 연합국가(USB : United States of Buyou)라는 것이다.
두 나라는 국가원수의 교체에 있어서도 서로 관여하는 등 거의 한나라 수준의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정치적인 일체성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백제의 진사왕이다. 또한 백제 - 가야 - 일본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실제 기록들이 『일본서기』에는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긴메이(欽明 : 531~71) 천황 2년에 백제의 성명왕(523~554 : 백제 성왕)이 가야에서 온 여러 사람들에게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의문스러운 점은 백제의 무왕이나 성왕은 일본의 죠메이천황(舒明天皇 : 628-641) 및 긴메이천황(欽命天皇)과 동일인이라는 여러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小林惠子『二つの顔の大王』(文藝春秋 : 1991)].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연합국가 범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다. AD 4세기에서 AD 7세기 반도부여(백제)의 멸망 때까지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는 연맹국가 이상 또는 같은 나라 수준이 아니면 곤란할 정도의 생산요소(production factors)나 국가자원(national resources)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하나하라(埴原和郎)는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渡來人)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 지방의 대부분 사람들이 도래인(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다.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까지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東京大學人類學雜紙 1987年 英文版「古代日本 移住者 數 推定」). 당시 교통수단이나 인구의 수준을 감안해 보면 이는 국가적인 이동에 해당한다.
AD 5세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반도부여(백제)는 대장장이․토목공사전문가․양조업자․의복재단사 등의 전문직 사람들을 대거 보냈으며 403년에는 궁월군[弓月君 : 하다씨(秦氏) 씨족의 시조]이 무려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 아지사주(阿知使主 : 아야족의 시조)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왔으며 463년(유략쿠 7년)에 대규모의 기능공들이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등 반도부여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오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앞의 책을 참고할 것)
뿐만 아니라 반도부여(백제)에서 열도부여(일본)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반도부여의 수준에 준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국가적 동일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즉 당시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인원이 일본으로 갔는데 이들은 백제에서 가졌던 지위에 따라 일정한 직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은 백제왕(百濟王)이란 호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일본 조정의 고위인사들이었다(『續日本記』) 귀족들의 경우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일본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략 60여명 정도의 백제 유민이 일본의 조정에 참여했으며 일본의 『고사기(古事記)』(712)나 『일본서기(日本書紀)』(681~620)의 편찬에도 깊이 개입한다.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범주에 둘 수 있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할 당시 반도부여(백제)를 방어하고 지키려는 일본의 의지가 하나의 나라가 아니면 곤란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일본은 마치 국운(國運)을 걸고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원정 해군을 지휘했으며 나카 왕자는 5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백제를 원조하게 했으며 풍왕자는 5천명이 넘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6명의 장군이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로 갔으며 당시 백제 부흥운동을 위해 파견된 백제의 좌평 복신(福信)에게는 화살 십만 척, 실 5백 근, 솜 1천 근, 피륙 1천단, 다룬 가죽 1천 장, 종자 벼 3천 석이 주어졌고 다시 피륙 3백단을 백제왕(풍)에 주었다(『日本書紀』「天智天皇」). 이러한 일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제․일본 연합군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패배하여 일본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三國史記』「百濟本紀」.).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서기』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日本書紀』「齊明天皇」).”라고 하고 있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 서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
[그림 ④] 반도부여의 슬픈 유적 : 백마강과 낙화암
이상의 논의들을 토대로 본다면 일본은 바로 반도부여를 이은 부여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백제와 일본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부여(扶餘)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가 있다.
참고 『대쥬신을 찾아서』제1권
12.일본 신들의 고향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18. 왜 한국인들의 이름 -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관련 사이트 : www. ebiz114.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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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후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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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1910 ~ 19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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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된 주몽. 사라진 북부여의 역사.
먼저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북부여를 개국한 북부여 제1대 단군이다. 그리고 그 둘째 아들이 고진이고 이 고진의 손자가 불리지이고 이 불리지가 하백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고주몽이다.
그리고 제4대 단군은 고우루인데 이 고우루의 단군의 동생이 바로 해부루다. 고우루 단군 때 한무제가 난하 유역의 왕험성을 중심으로 한 위만 정권의 분열을 틈타 쳐들어 오는데, 이를 일거에 격파하고 동명국을 개창한 이가 바로 고두막한이다.
이 고두막한은 이번 대하사극에 그 이름조차 빠져있다. 이 고두막한은 제5대 북부여 단군이 되는데 이 분의 손녀가 바로 소서노다. 그러므로 소서노는 제6대 고무서 단군의 외동 딸인 바, 고무서 단군은 주몽을 자신의 사위로 삼아 북부여를 넘겨준다.
그리고 해부루란 제4대 고우루 단군의 동생으로 고두막한의 배려로 가섭원 땅으로 옮겨가 동부여를 개창하게 된다. 그리고 금와는 이 해부루의 아들이고, 이 금와의 아들이 바로 대소다.
연타발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제2대 모수리 단군의 신하로 상장이 되어 위만의 침입을 차단한 인물이고, 한 사람은 거상으로서 고주몽의 신하가 되어 나중에 좌원에 봉해진 인물이다.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불리지와 야합을 한 까닭으로 아버지 하백에 의하여 별궁에 유폐되는데, 이 유화를 거둔 것이 바로 해부루이다. 그 후 유화는 불리지의 아들인 주몽을 출산하게 되는데, 이 주몽은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기 전에 이미 동부여에서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유리를 두게 된다. 이 유리는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제치고 나중 고구려 황제가 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는데 제5대 고두막한 집안의 매력이다. 동명제 고두막한은 원래 단군조선 47대 단군조선의 마지막 고열가 단군의 후손이다. 그리고 이 고열가 단군는 단군조선 43대 물리 단군의 고손자다. 그리고 환단고기에서는 단군조선 29대 마휴 단군 부터 43대 물리 단군까지는 자기 아들에게 대를 전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화충의 난을 평정하고 제위에 오른 제 44대 단군이 조선에서 대부여로 국호를 변경하였으므로, 제43대 단군은 단군조선 마지막 단군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상장군으로 한개의 난을 평정하고 제위에 오른 47대 고열가 단군은 고리국인 종실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나고, 제후들이 말을 잘 안들어먹자 오가에게 정치를 맏기고 제위를 버리고 은둔하므로서 대부여는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됨으로 고열가 단군은 대부여의 마지막 단군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삼한 일통의 사상에 의하여 제47대까지를 단군조선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고두막한이 한무제의 침입을 격퇴하고 동명국을 건국하여 이를 기반으로 북부여 제5대 황제가 되었는데 그 아들인 제6대 고무서 단군이 해모수의 후손인 고주몽을 사위로 삼아 제위를 넘김으로서 북부여는 제6대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됨으로 고무서 단군은 북부여 마지막 황제 및 동명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고주몽이 고구려로 국명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두막한 혈통은 단군조선 제2기라 볼수있는 제22대 색불루 단군으로 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28대와, 29대가 태자나 자로서 제위에 올랐다는 말이 없으므로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며, 환단고기에서는 정황상 27대와 28대 통치기간에 여러가지 천재지변 및 여러 우환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대하사극 주몽을 보면서 몇 가지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 해모수의 진손자 불리지의 부인인 하백의 딸 유화가 해모수의 부인이 된 점.
- 소서노는 제6대 고무서 단군의 딸인데, 소서노가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된 점.
- 북부여와 동부여는 별개이며, 북부여는 황제국이고, 동부여는 북부여의 명을 받드는 제후이라는
점.
- 그리고 이 때는 열국시대로서 우리 민족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나라와는
천진, 북경 근방에서 대치중인 상태로 아직은 북부여를 중심으로 형식상이라도 연합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 글 : 송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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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전 우리나라 지도
1700여년 전 당시 고대 한국 국가들의 영토확장, 타지정벌 및 진출로.
한글 지명.
영문 지명.
-부여가 완전히 고구려로 통합되기 전까지 부여는 오늘날의 러시아 땅 중남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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