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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려대학교 연구소에서 학계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상온 초전도체 LK99가 있다는 연구결과 발표를 함에따라 관련 해외연구기관들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는 의견들을 발표하면서 그 반응이 뜨거워지고 있다. 이에 따라 소위 초전도체 관련주라고 하는 주식들은 연구기관 및 전문가들의 긍정 또는 부정 발표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래 초전도체는 영하 200~300도의 온도에서만 작동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상온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초전도체가 존재한다고 하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융합, 양자컴퓨터, 자기부상기술 등 미래 고차원 기술로만 인식되어 왔던 기술들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LK99가 사실인지 사기인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 주식 투자에는 주의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초전도체란

    일반적으로 전기의 전도성관 련련된 재료로는 도체(Conductor), 부도체(Insulator), 반도체(semiConductor), 초전도체          (superconductor) 등이 있다고 한다

ㅇ 도체(Conductor)란

     전기를 효과적으로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물질로 전기 저항이 매우 낮으며 금속이 이에 해당한다 

ㅇ 부도체(Insulator)란

    전기가 거의 전달되지 않는 물질로 전기저항이 매우 높아서 전기를 차단하고 절연을 하는 역할을 하는 플라스틱, 고무,        유리, 직물 등이 있다

ㅇ 반도체(semiConductor)란

    도체와 부도체 사이의 특성을 가지는 물질로 전기 전도성이 돞체보다는 낮니만 부도체보다는 높다. 따라서 반도체는 일      정한 조건하에서 전류가 자유롭게 흐르기 때문에 특정조건하에서는 전기적 제어가 가능한 것으로 다양한 전가기기의        반도체 소자를 제작하는 핵심 재료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다

  ㅇ 초전도체(superconductor) 

     매우 낮은 특정 저온에서만 전기저항이 0에 가까운 물질을 말한다. 초전도체는 매우 낮은 온도에서만 전류가 자유롭게       흐르기 때문에 매우 높은 전도성을 갖는다. 초전도체는 1911년 네델란드의 레이디그릭이 처음 발견한 이래 많은 연구         와 기술발전이 이루어져 오고 있다. 초전도를 가진 재료로는 납-비스무트계,이스라엘산산화이트륨(YBCO), 철 비스무         트계 등이 있다. 그러나 초전도체를 유지하하기 위해서는 매우 낮은 온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상용화에 어려움이 있으         나 현재 MRI(자기공명 영상 촬영장치) 등에 사용되고 있으나 저온유지를 위한 냉각시스템과 같은 장치 를 위해서는             매우 복잡하고 많은 비용이 소요되기에 사용대가가 고가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시점에 우리나라 고려           대학교에서 상온 초전도체 LK99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함ㅁ에 따라 학계가 발칵 뒤집힐 수 밖에 없고, 여러 의견 속에           미국 메릴랜드대 응집물리센터에서 SNS를 통해 LK-99는 상온과 저온에서 초전도성이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아 초전도       체가 아니라고 발표했고 그와 관련된 관련주들의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으나, 우리나라 다른 연구기관에서 검증중에 있       고  또 다른 외국 학자들은 초전도체 LK99의 존재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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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엣지 브라우저 업데이트 방법

 

2021.04.23. 18:2576 읽음

마이크로소프트 엣지(Edge) 브라우저에서 [설정]-[Microsoft Edge 정보] 메뉴에서 업데이트를 진행해 보자.

 

 

업데이트

Update

마이크로소프트 엣지(Edge) 브라우저 설정화면에서 Microsoft Edge 정보 메뉴를 선택하면 업데이트 버전이 있을 경우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가 진행된다.

 


  

다시 시작

Restart


마이크로소프트 엣지(Edge) 브라우저 업데이트가 완료되었다면 [다시 시작] 버튼을 클릭해서 재시작하면 된다.
"Microsoft Edge가 최신 상태입니다."라고 표시된다면 업데이트가 정상적으로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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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4일, 예정대로 윈도우7(Windows 7)의 기술지원이 종료됐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속적으로 윈도우7 지원 종료를 공지해왔지만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상당수의 윈도우7 사용자들은 다른 운영체제를 선택하기 보다 그나마 익숙할 것으로 생각되는 윈도우10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달 여가 지난 지금도 윈도우10 환경이 낯설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와 관련해 윈도우10을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기능을 알아본다.

 

 

1. 공간 정리하기

방 안에 물건들이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려 있으면 새 물건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방을 크게 넓히지 않는 한 결국 정리하고 청소를 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PC도 마찬가지. 특히 윈도우10이 설치된 C 드라이브는 빈 공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좋다.

 

윈도우10 공간 확보를 위한 설정 화면은 설정 -> 시스템 -> 저장 공간 경로로 들어갈 수 있다. 저장 공간 메뉴를 선택하면 오른쪽 화면에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임시 파일만 지워도 어느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림 1] 윈도우10 저장 공간 관리하기

 

그래도 공간이 부족할 때는 저장 공간 센스를 이용하면 된다. 저장 공간 센스를 켜 놓으면 윈도우가 공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자동으로 공간 확보 기능을 실행한다. 저장소 센스 구성 또는 지금 실행 메뉴를 클릭하면 된다. 드라이브 최적화를 통해서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도 있다. 조각모음이라고도 부르는데 저장 공간 -> 드라이브 최적화 링크를 클릭하면 된다. 하지만 하드디스크가 아닌 SSD라면, 조각 모음을 하지 않는 게 좋다. SSD의 저장 기술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조각모음을 해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2. 시작 프로그램 정리하기

시작 프로그램은 PC가 부팅 될 때 처음에 시작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시작 프로그램으로 설정해 놓으면 부팅하면서 자동적으로 실행되기 때문에 따로 실행할 필요없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프로그램이 시작 프로그램에 있으면 컴퓨터가 버벅댈 수 있어 이 역시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정리하는 것이 좋다.

 

윈도우10에서 시작 프로그램을 등록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윈도우 검색창에서 ‘실행’을 찾고 [그림 2]와 같이 실행의 ‘열기’ 란에 shell:startup을 친 후 확인을 눌러주거나 엔터를 클릭해준다. 그럼 시작 프로그램 폴더가 열리는데, 이때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끌어서 넣어주면 된다. 혹은 복사 붙여넣기 하면 윈도우10 시작프로그램 등록이 완료된다.

 

[그림 2] 윈도우10 시작 프로그램 등록 방법

 

시작 프로그램 폴더 내에는 자신이 원해서 등록한 시작 프로그램도 있지만, 프로그램을 설치하면서 자동으로 등록된 앱들도 있다. 이를 정리를 해주지 않으면, 컴퓨터를 시작할 때마다 실행이 되어 부팅 속도를 느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에 윈도우10 시작 프로그램 정리를 통해서 꺼주는 것이 좋다.

 

정리할 때는 시작메뉴에 들어가서 좌측하단에 설정(톱니모양)을 클릭해준다. 윈도우 설정 화면이 뜨는데, 이때 '앱'을 클릭해준다. 앱 화면에서 '시작 프로그램'을 클릭하면, 현재 설정되어 있는 시작 프로그램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작메뉴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고 '작업관리자'를 실행하거나 Ctrl+Alt+Delete를 눌러서 '작업관리자'를 실행해서 시작 프로그램을 선택해도 된다. 시작할 때 불필요한 프로그램들은 '끔'으로 설정을 해주면 윈도우10 시작 프로그램이 정리가 된다.

 

[그림 3] 윈도우10 시작 프로그램 설정 화면

 

3. 불필요한 프로그램 삭제하기

당연한 소리 같지만 사용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모두 삭제하는 것이 좋다. 윈도우 시작 메뉴를 열고 ‘프로그램 추가 또는 제거’를 검색하기만 하면 된다. 상단 옵션을 선택하면 설치된 프로그램 목록을 크기별로 정렬해 가장 많은 디스크 공간을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을 빠르게 찾을 수 있다. 목록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해당 프로그램을 클릭한 다음, 제거하면 되는데 사용하지 않는 프로그램만 삭제해야 한다. 해당 앱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는 경우, 혹은 중요한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경우 삭제하지 않는 게 좋다. 시스템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삭제할 경우 컴퓨터가 부팅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외 윈도우10 활용 꿀팁

◈ 파일 찾기

파일을 서둘러 찾아야 하는 경우, 시작 메뉴 검색 상자에 파일 이름을 입력하면 된다. 윈도우 10에서는 작업 표시줄에 상자가 있으므로 검색이 편리하다.

 

◈ 문서는 바탕화면이 아닌 폴더에

문서는 바탕화면이 아닌 관련 폴더에 저장하는 게 좋다. 바탕화면이 가득 차게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럴 경우 성능에 무리가 될 뿐 더러 작업 효율에도 좋지 않다. 따라서 바탕화면은 10개 이내의 아이콘만을 배치하는 것이 좋다.

 

◈ 폴더 이름 지정하기

파일을 열지 않고도 파일 내용을 파일 이름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사진 파일 이름에 위치를 추가하는 것이 좋고 날짜를 포함시키는 것도 유용할 수 있다.

 

◈ 키워드 사용하기

파일을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클릭하고 속성을 선택하면 표시되는 키워드를 통해 파일을 좀 더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워드 프로그램에서는 파일 -> 속성으로 이동해 키워드 필드를 채우고 확인을 클릭하고, 사진의 경우 태그는 키워드와 동일하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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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알못’을 위한 컴퓨터 사양 원포인트 레슨

                               

이른바 ‘컴알못(컴퓨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김 모씨는 최근 새 노트북을 구매하기로 결심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얼리어답터로 통하는 친구 정 씨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친구는 열심히 모델과 가격을 비교하고 알아본 후 마지막으로 김 씨에게 확인 차 질문을 던졌다. 

친구: 메모리 용량이 8기가인데, 괜찮지?

김 씨: 응? 그럼 용량 모자라면 외장하드 연결해서 써야해?

친구: …..아니~~! 메모리 말야, 메모리. 속도가 이 정도면 되겠냐고.

김 씨: 메모리라며? 메모리가 저장 공간 아냐?

 

 

(*이미지 출처:  shutterstock.com) 

 

졸업•입학 시즌을 맞아 노트북이나 데스크톱 컴퓨터를 새로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보니 이왕이면 저렴한 가격으로 더 좋은, 더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을 사고 싶은 것이 공통된 마음 일터. 쇼핑몰 사이트별로 가격 비교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전에 어떤 모델을 사야할지가 더 고민이다. 

 

게다가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컴퓨터 사양 정보를 봐도 뭐가 뭔지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어 보자니 나만 모르는 건가 싶어 민망하고, 그래서 혹시 속아 사게 되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게 된다. 컴퓨터를 사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숫자만 보고도 한 눈에 컴퓨터 사양을 알아차릴 수 있는 정보를 간단히 정리했다. 

 

CPU, 일단 숫자 큰 걸로 사고 본다?

컴퓨터에서 가장 기본적인 부품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인 CPU(Central Processing Unit)이다. CPU를 구입할 때 비교해야 할 건 제조회사, 클럭 스피드, 코어의 형태이다. 제조회사는 대표적으로 인텔과 AMD가 있고 클럭 스피드와 코어의 수는 높을수록 좋긴 하지만 무조건 그런 건 아니다. 

 

CPU의 성능을 가늠하는 주요 요소는 클럭과 코어이다. 클럭은 초당 작업 처리 횟수를 뜻하며 단위는 Hz(헤르츠)를 사용한다. CPU 클럭만 높다고 무조건 빠르다고 할 수 없는 건 CPU와 함께 연결된 다른 하드웨어와 CPU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코어는 1개면 싱글코어, 2개는 듀얼코어, 4개는 쿼드코어, 6개는 헥사코어, 8개는 옥타코어라고 부른다. 코어가 많을수록 동시에 더 많은 작업을 처리할 수 있지만, 숫자가 높다고 무조건 처리 속도가 빠른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동시 작업이 적은 프로그램이라면 듀얼코어보다 싱글코어가 더 빠를 수도 있다. 2코어 4쓰레드는 2개의 코어로 4개의 코어의 성능을 낼 수 있는 건데 쿼드코어보다는 성능이 낮다. 

 

코어는 2개지만 가상의 코어를 더 만들어서 쿼드코어인 척하는 것이다. 쿼드코어 이상은 주로 동영상이나 3D 게임처럼 복잡하게 동작하는 프로그램에 적합하고, 일반 사무용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데는 싱글, 듀얼코어만 해도 충분히 좋다. 

 

인텔 CPU는 i3, i5, i7, i9 프로세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아래에서부터 사무용, 일반 게임/멀티미디어용, 고사양 게임/작업용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인텔 코어 i 시리즈 프로세서와 비견되는 AMD 제품은 라이젠 시리즈가 있다. 성능은 인텔 CPU와 비슷하지만 가격 면에서는 AMD가 조금 더 저렴하다. 여기서 잠깐, 컴알못 보다는 많이 아는, 그러나 여전히 2% 부족한 일반인들의 컴퓨터 사양에 대한 일화를 살펴보자. 

 

A 씨: “나 이번에 중고 컴퓨터 하나 샀어.”

B 씨: “뭘로 샀는데?”

A 씨: “그냥 조립PC인데 CPU가 i7이더라.”

B 씨: “좋겠다. 나도 얼마 전에 샀는데 난 i5이거든.”

 

알고 보니 A 씨의 CPU는 i7-4790이고, B 씨의 CPU는 i5-8400이었다. 과연 A 씨의 컴퓨터는 B 씨의 것보다 얼마나 좋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선 CPU에 i 시리즈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또 i 다음에 오는 숫자가 크면 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숫자가 크면 좋긴 하지만 무조건 그렇진 않다. 위의 사례에서도 i7이 더 좋은 것 같고 체감상으로 두 제품이 큰 차이가 없겠지만, 엄격히 따지면 8세대 제품인 i5 CPU가 더 좋을 수도 있다. 

 

클럭과 코어 못지 않게 최근 들어 중요해진 수치가 스레드(Thread)이다. 스레드는 수가 많을수록 더 좋은 성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인텔 i3 CPU는 코어가 2개이면서 쓰레드가 4개이다. 간단한 온라인 게임이나 웹서핑, 문서작업들을 하기엔 충분하다. 이보다 저렴한 컴퓨터를 맞추길 원하는 사람들은 i시리즈 전 제품인 펜티엄 CPU를 장착해도 좋다. 7세대 펜티엄부터는 가성비가 좋기 때문에 그래픽 카드만 잘 선택하면 고사양의 PC 게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메모리가 저장 공간이 아니라고? 

우리가 흔히 ‘메모리’라고 부르는 컴퓨터의 구성 요소는 램(RAM, Random Access Memory)으로, 컴퓨터의 임시 저장장치이다. 하드디스크는 사용자가 지우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저장장치인 반면, 메모리는 전원이 꺼지면 곧바로 데이터가 소멸되는 휘발성 저장장치이다. 

 

데이터 접근 속도 면에서는 메모리가 하드디스크보다 우수하다. 메모리가 저장이 아닌 ‘속도’와 관련 있는 구성 요소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 최근 들어 사용자들이 하드디스크보다 SSD를 더 선호하는 이유도 빠른 속도 때문이다. 

 

컴퓨터 메모리는 고사양 소프트웨어를 실행할 때 차이가 많이 난다. 포토샵 같은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물론 고사양 게임을 실행할 때 메모리의 성능은 아주 중요하다. 최근 출시되는 컴퓨터는 4GB 정도의 메모리 용량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의 용량은 일반적인 인터넷 서핑이나 중저사양 게임을 할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프리미어와 같은 특별한 그래픽 소프트웨어나 고사양 게임을 하고 싶은 경우에는 4GB의 용량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 때에는 8GB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 메모리를 8GB 이상으로 용량을 늘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체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컴퓨터 메모리는 흔히 DDRx식으로 구분된다. 숫자가 크면 클수록 최근에 개발된 메모리이며, 속도 역시 빠르다. 메모리는 무턱대고 구입하면 안 된다. 본인의 메인보드에서 어떤 종류의 메모리를 지원하는가를 확인한 후에 구입해야 한다. 

 

메모리는 SRAM, DRAM, SDRAM 순으로 발전해 왔고, 현재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램은 DDR SDRAM이다. DDR SDRAM은 성능이 향상되면서 DDR2, DDR3, DDR4 순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건 DDR3 램이지만, 인텔과 AMD 최신 CPU가 DDR4 램 전용으로 출시되면서 DDR4로 빠르게 세대 교체되는 추세이다.

 

앞서 언급한 SSD(Solid State Disk)는 낸드플래시 메모리로 만든 저장장치로, 반도체를 이용한 하드디스크라고 생각하면 쉽다. 컴퓨터 부품 중 교체 시 가장 현실감 있게 체감할 수 있는 부품이 바로 SSD로, 하드디스크는 백업 용도로, 운영체제는 SSD에 설치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SSD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 충격으로 데이터가 손상되지 않고 하드디스크처럼 물리적인 지연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SSD는 하드디스크에 비해 버벅거림이 전혀 없다. 부팅 속도부터 HDD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 게임을 즐기거나 그래픽 작업 등을 많이 하는 유저들에게 필수장치로 인식되고 있다. 단점은 하드디스크 대비 비싼 가격인데 최근 들어 가격이 매우 저렴해졌다. 때문에 CPU 업그레이드보단 SSD를 장착하는 게 컴퓨터 속도를 쉽게 올릴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HDD와 비교했을 때 SSD가 약 2.5배 이상 빠르다. 

 

SSD는 PC와 연결하는 방식에 따라서도 전송 속도가 달라지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결하는 SATA3 규격에서는 최대 550MB/s 정도의 전송 속도를 내고 M.2 NVMe 규격으로 연결하면 1GB/s 이상의 속도까지 구현할 수 있다. 현재 HDD의 최대 전송 속도는 200MB/s 정도이니 SSD가 최대 5배까지 빠르다고 할 수 있다.

 

모니터, 크고 넓을수록 잘 보일까?

컴퓨터를 구입할 때 본체의 CPU와 메모리를 빼고 몇 가지 선택할 수 있는 제품으로 모니터가 꼽힌다. 모니터에서 가장 먼저 고려하는 요소는 크기이다. 흔하게 말하는 24인치, 32인치 등은 모니터의 대각선 길이를 나타낸다. 24인치는 대략 61cm, 32인치는 81cm 정도 되며 흔히 24형, 32형으로 표시되기도 한다.

 

모니터에서는 크기보다 사실 해상도가 가장 중요하다. 가장 보편적으로 보급되어 있는 1920x1080(FHD) 해상도의 모니터는 한 화면이 2,073,600개의 점(화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해상도가 높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모니터는 작은데 해상도를 너무 키우면 글자나 이미지가 너무 작게 보이는 단점이 발생한다. 따라서 화면 크기와 해상도가 서로 어울리는 모니터를 구매해야 눈이 편안하다. 

 

보통 24인치 모니터라면 16:9 비율의 1920x1080 해상도가 적당하고, 32인치 이상이라면 3840x2160도 고려해 볼만하다. 요즘에는 16:9에서 좌우를 더 길게 늘인 변형된 해상도의 모니터도 출시되고 있다. 기존의 와이드에서 더 넓어졌다는 의미로 울트라 와이드라고도 부르는데, 대체로 21:9 화면비가 많다. 21:9 화면비의 모니터는 일반적인 용도보다는 게임이나 영화 감상 등을 목적으로 구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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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전 한국인들의 생활상 귀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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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되면 껐다 켜라. 그러면 된다”

컴퓨터 초보자들에게 진리처럼 통하는 말이지만, 사실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다. 컴퓨터가 버벅거리거나 잘 안 돌아갈 때 컴퓨터를 재부팅하면 빨라지는 효과를 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무조건 껐다 켜는 게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기계는 ‘아는 만큼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다. 똑딱이 카메라도 전문가가 찍으면 명품 사진이 된다. 컴퓨터 역시 사용자가 아는 만큼만 작동한다. 내 컴퓨터를 빠르고 편리하게 쓸 수 있게 도와주는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내 컴퓨터가 갑자기 느려졌거나 인터넷이 잘 안 될 때가 있다. 껐다가 켜면 잠깐 잘 되는 희열을 맛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치유책은 아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대부분 불필요한 프로그램이 많이 설치돼서 하드디스크나 메모리를 잡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바이러스나 악성코드 등에 감염된 경우도 비슷한 증상이 나온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땐 데이터를 백업한 후 하드디스크를 포맷하고 운영체제를 새로 설치해서 컴퓨터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좋은 방법이겠지만, 여간 성가신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PC를 잘 아는 사용자에게나 해당된다. 이것 저것 설정을 바꾸어야 하는 과정들이 많은 운영체제의 재설치 작업은 초보자들에겐 엄두를 내기 힘들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PC를 효율적으로 관리해주는 최적화 프로그램들이다.

 

 

최적화 프로그램만 돌려도 PC 성능 ‘업’

PC를 최적화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프로그램이나 파일 삭제는 간단할지 모르지만 시작 프로그램이나 레지스트리를 수정하는 작업은 전문가들조차도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엉뚱한 시스템 파일을 지운 후 컴퓨터가 먹통이 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파일 하나를 삭제하는 것도 망설여지게 마련이다. 최적화 프로그램들은 이런 과정들을 스킵할 수 있도록 지워도 되는 파일과 프로그램들을 자동으로 선택해서 최적화해준다.

 

그렇잖아도 할 일이 많은 직장인들이 PC를 최적화하는데 몇 시간씩 쓰는 건 시간 낭비일 것이다. PC 최적화 프로그램들은 클릭 한 번으로 복잡한 시스템 최적화를 할 수 있게 해주어 이런 헛수고를 줄여준다.

 

포털 사이트에서 ‘시스템 최적화’로 검색을 해보면 소프트웨어 정보에 수십 개에 달하는 프로그램들이 검색된다. 각각 기능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PC 최적화를 자동화해주는 프로그램들이다. 각자 취향에 맞게 설치하면 되지만, 기존에 설치된 백신 프로그램과 일부 충돌이 되는 것들도 있으니 사용자 후기 등 평판부터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다. 

 

  

PC최적화 프로그램 검색 결과 (출처: 네이버)

 

네이버 검색 결과에 따르면, PC 최적화 프로그램 1위는 ‘고클린’이다. 고클린은 누적 다운로드 1181만명으로, 다른 프로그램들의 다운로드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인기순으로 2위를 기록중인 CCleaner는 외산 소프트웨어인데, 전 세계적으로 10억명 이상이 다운로드한 인기 유틸리티이다. 그 뒤로 네이버클리너와 게임 속도를 최적화하는 패스트팽이 있다.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들은 무료 소프트웨어라는 점이 장점이다.

 

 

무료 PC최적화 프로그램, 장점과 단점은?

 


 

고클린

 

고클린은 PC초보자들보다는 컴퓨터를 어느 정도 아는 사용자들에게 유용한 유틸리티이다. 인터넷이 느려질 때라든지 쓸모 없는 액티브X 삭제, 하드디스크 최적화, 시작프로그램 관리, 복원, 파일 강제 삭제 등의 메뉴를 통해 PC를 관리하고 최적화할 수 있다. 다만, 지속적으로 광고를 노출한다는 게 단점이다. 

 

  

C클리너

 

C클리너는 복잡해 보이지만 다양한 기능들을 포함하고 있다. 고클린보다 좀 더 전문적인 PC 지식을 갖춘 마니아들에게 적합하다. 프로그램 설치 시 툴바가 설치되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 일부 고급 기능은 유료로 제공된다. 하지만 무료 기능으로도 충분히 PC 최적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시스템, 레지스트리 등의 불필요한 파일들을 삭제하고 하드디스크의 용량 확보는 물론 시스템 최적화를 할 수 있다. 

 


네이버클리너

 

앞선 두 유틸리티에 비해 네이버클리너는 좀더 심플하다. 간편청소시작 메뉴 하나만 누르면 기본적인 PC정리는 끝난다. 광고노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주 초보의 PC 사용자들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전하고 쉬운 PC최적화를 원한다면 ‘V3 365 클리닉’

위에서 살펴본 무료 프로그램은 광고나 한글 지원이 안 된다는 점 때문에 이용하기가 꺼려진다면, 또는 별 다른 기능이 없어 내키지 않는다면 V3 365 클리닉의 PC최적화 기능을 추천한다.

개인용 프리미엄 백신(Anti-viurs) 프로그램인 V3 365 클리닉은 강력한 악성코드 탐지 및 차단 등 백신 기능 외에 다양한 고급 기능을 제공한다. 특히 홈화면에 PC 보안 상태를 직관적인 컬러로 보여주고 주요 고급 기능 바로 가기 버튼을 노출하고 있어 복잡한 PC 활용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용자들도 쉽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PC 부팅 속도나 인터넷 연결 속도가 느려질 때, 또는 프로그램 실행이 원활하지 않을 때 버튼 하나만 클릭하면 PC 성능을 향상 시키고 사용자 편의성을 향상시켜준다. 

 

☞ ‘V3 365 클리닉’ 자세히 보기 

 

 

  

▲V3 365 클리닉 PC최적화 기능

  

특히 내 PC에 설치된 액티브X나 툴바의 목록을 정리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원치 않는 프로그램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 또 ‘파일 완전 삭제’ 기능을 이용하면 민감한 파일이나 폴더 삭제 시 왠지 모를 찜찜함까지 해결할 수 있고, 개인정보 유출 등의 위협을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PUP 진단’ 기능을 이용해 PC 메모리를 점유하고 있는 PUP를 찾아 제거함으로써 PC 활용도는 극대화하고, 잠재적인 보안 위협을 최소화한다. 

 

개인용 프리미엄 백신 V3 365 클리닉 외에도 기업용 V3 제품인 V3 Internet Security 9.0, V3 Endpoint Security 9.0에서도 PC최적화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 

 

 

무료 프로그램 이용 시, ‘이것’은 꼭 확인해야

위에서 살펴본 것 외에도 다수의 무료 PC최적화 프로그램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무료 프로그램 다운로드 시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대부분의 무료 프로그램 다운로드 시 함께 설치되는 불필요한 프로그램(PUP)이다. PUP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사용할 일 없는 PUP는 쓸데없이 PC 메모리를 차지하는 주범이다. 내 PC를 가볍게,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최적화 프로그램을 깔았는데 PUP도 함께 설치해 또 다시 PC의 공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또 상대적으로 프로그램 유지보수가 지속되지 않는 PUP가 악성코드 유포에 이용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견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실제로 최근에는 PC최적화 프로그램으로 위장하여 광고를 노출하는 PUP가 악성코드 유포에 이용된 사례도 있었다. 

 

☞ 관련 기사 보기: PC 최적화 프로그램에 숨어든 악성코드?! (시큐리티레터 662호)

 

무료 프로그램 이용 시 주의해야 할 또 하나는 바로 ‘광고’이다. 이젠 국내에서도 프로그램을 무료로 이용하는 대신 광고가 동반된다는 인식이 많이 자리잡았다. 관심 없는 광고가 등장하는 약간의 불편함은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일부 배너 광고가 악성코드 유포에 이용된다는 점이다. 광고(Advertising)에 악성코드(Malware)를 삽입해 유포하는 멀버타이징(Malvertising) 공격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멀버타이징 기법은 특히 랜섬웨어 유포에 자주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무료 프로그램을 이용할 때도 우선 사용자들의 평판을 충분히 살펴보고, 설치할 때는 ‘설치 정보’를 꼼꼼히 확인하여 제휴 프로그램 또는 스폰서 프로그램으로 함께 다운로드되는 PUP가 설치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또 온라인 배너를 악용한 멀버타이징 공격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 OS와 주요 프로그램의 보안 업데이트를 적용하고 백신 또한 최신 버전의 엔진을 적용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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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수없이 많은 번호를 부여 받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산다. 생년월일에서부터 주민등록번호, 집의 현관문 키 번호, 집 주소의 번지 수, 건물 동이나 호수, 출퇴근 시 타고 다니는 버스 번호, 자신이나 가족의 핸드폰 번호, 통장 계좌번호 등 각종 번호에 묻혀서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번호들을 전부 다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적어도 수십 개 정도의 전화번호쯤은 가볍게 외우고 다녔는데 이젠 서너 개 외우는 것도 버겁다. 디지털 기기에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이 크게 저하된 디지털 치매(Digital Dementia)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여러 번호들 가운데 특히 비밀번호가 기억하기 힘들다. 1인당 최도 5개 정도는 되는 비밀번호를 기억하기 위한 관리 팁을 공유한다.

 


 

수없이 많은 해킹 사고를 겪으면서 개인정보의 유출로 인해 비밀번호의 ‘룰’이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6자리 이내의 간단한 영문이나 숫자로 비밀번호를 만드는 게 가능했지만 요즘에는 기본 12자리에 여기에 숫자와 특수문자를 함께 넣어야 비로소 비밀번호를 완성할 수 있다. 솔직히 이걸 만드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 게다가 6개월에 한 번씩 비밀번호를 바꿔주어야 하는 것도 기억력의 한계를 시험하기에 충분하다. 오죽했으면 ‘패스워드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을까.

 

 

비밀번호, 어떻게 만들어야 기억하기 편할까?

이런 경험들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분명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기억하는 대로 넣었는데 맞지 않는다는 경고창이 뜬다. 하는 수 없이 ‘아이디 찾기’를 눌러 휴대폰 인증이나 아이핀 인증을 통해 받았는데 아이디가 틀린 경우는 다행이다. 비밀번호가 틀린 경우는 좀 복잡하다. 임시 비밀번호를 메일로 받아서 다시 로그인한 다음에 새로운 비밀번호를 설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다시 만들어야 할 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기존에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살짝 변경해서 저장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비밀번호는 나중에 다시 접속하려 했을 때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십중팔구다.

 

위 사례는 인터넷에서 자신이 가입한 사이트 수가 늘어나면서 비밀번호가 헷갈린 게 주요 이유다. 귀중한 개인정보나 돈과 관련된 비밀번호는 특히 주기적으로, 남들이 절대 알 수 없는 수준의 조합으로 생성해야 한다. 개인 메일의 비밀번호나 은행 공인인증서나 인터넷 뱅킹 비밀번호 등이 대표적이다. 어떻게 해야 패스워드 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래에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비밀번호 한글을 영문으로 만들기

대부분의 비밀번호는 영문과 숫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많은 이들이 비밀번호로 자신의 이름이나 닉네임, 기억하기 쉬운 생일, 또는 특정 숫자를 조합하는데, 이것보다 더 쉽고 뚫리기 어려운 비밀번호 만드는 방법은 바로 한글을 영문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이름이 ‘한국’이고 생일이 3월23일이라고 가정하면 ‘hankook’+0323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gksrnr’+0323으로 만드는 게 훨씬 강력하다. 한국을 영문 스펠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영문 모드에서 그대로 한글 한국을 치면 gksrnr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에 숫자를 조합하면 된다. 물론 이건 예제일 뿐이고 비밀번호는 이름처럼 남들이 유추하기 쉬운 단어는 지양하고 신상과 관계없는 단어로 만드는 게 좋다. 또한 중요한 사이트와 덜 중요한 사이트의 비밀번호는 분리해 사용하는 것이 좋다.

 

흔한 단어 대신 ‘어구’를 설정하기

자신의 이름이나 회사, 학교, 지역 등과 같은 단어를 이용해 비밀번호를 만드는 건 해킹 당하기 쉬운 조합이다. 위의 사례처럼 한글을 영문으로 만드는 방법이 귀찮다면 두 단어 이상의 어구(語句)로 설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앞서 ‘한국+0323’ 같은 조합보다 ‘한국처럼+0323’이 훨씬 강력한 비밀번호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비밀번호는 ‘gksrnrcjfja0323’이 된다.

 

키보드의 일상적 패턴 피하기

비밀번호 중 가장 최악의 비밀번호가 이런 형식이다. 키보드의 순서 그대로 비밀번호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123456 같은 일률적인 숫자나 qwerty, asdfg, zxcvb처럼 겉보기엔 어려워 보이지만 키보드 상의 나열된 철자를 그대로 활용한 비밀번호는 가장 해킹되기 쉬운 최악의 비밀번호이다. 행여나 이런 비밀번호를 그대로 사용할 심산이면 대문자와 소문자를 섞는다든지(예 : QwErT) 특수문자를 중간중간 넣은 것(a!s!d!f!g)도 방법이다.

 

사이트 성격에 따라 비밀번호 설정하기

비밀번호를 기억하기 쉬운 방법 중에 하나는 사이트 성격에 맞는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hankook0323이 메인 비밀번호라고 한다면 인터넷 뱅킹은 ‘bank’를 붙여서 hankookbank0323으로, 공인인증서는 ‘cert’를 붙여서 hankookcert0323으로, 네이버는 hankooknaver0323으로, 다음은 hankookdaum0323으로 바꾸는 식이다. 물론 여기에 앞서 설명한대로 한글을 영문화한 다음에 bank나 cert 등을 붙이거나 앞뒤로 특수문자를 결합한다면 금상첨화이다.

 

비밀번호 관리 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비밀번호의 기본 개념은 ‘비밀’에 있다. 즉, 남들이 알아내기 어려워야 비밀번호인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장, 집주소 등 기본적인 내용만 가지고도 비밀번호를 유추해 낼 수 있다면 그건 비밀번호가 아니다. 아무리 하드웨어적인 보호장치가 뛰어나더라도 기본적인 비밀번호에서 허점이 발생한다면 값비싼 장비도 무용지물이다. 따라서 비밀번호는 매우 강력해야 한다. 

 

기존의 비밀번호가 너무 쉬운 까닭에 6개월에 한번씩 비밀번호를 변경하라고 권장하지만 강력한 비밀번호라면 굳이 변경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너무 자주 바꾸다 보면 생각하기 쉬운 비밀번호로 다시 회귀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단, 사용하고 있는 계정의 회원 정보가 해킹으로 유출됐다거나 누군가 내 아이디로 잘못된 로그인 접근을 할 경우엔 비밀번호를 즉시 바꾸어야 한다.

 

비밀번호가 관리하기 어려운 점을 해결하기 위해 비밀번호 관리 앱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사용자들이 원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앱들은 대부분 유가로 구입해야 하는 단점도 있거니와 비밀번호 데이터를 어디에 저장하더라도 그 데이터를 어떻게 암호화하고 보안화할 것인지는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밀번호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을 관리하는 것 역시 사람이 제일 낫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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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본 글은 오소운 목사가 작성한 글을 스크랩하여 일부 재구성함. 선비]

 

 

외국 학자들이 보는 동이족(東夷族) 글 : 오소운 목사

 

 

▶ 들어가는 말 ◀

지금의 중국 중심부, 이 지역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중심에 있으면서 동아시아를 지배한 어질고, 예절바르고, 창의력이 넘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동이족(東夷族)」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도 동이족이요,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羲和子)는 물론,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도 동이족이다.

 

동양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최고의 성군(聖君)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동이족이요,

최초로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무장하여 박치기 전법으로 유명한 치우(蚩尤) 천황도 동이족이요,

갑골문자, 상형문자, 표의문자, 한문자(漢文字, 소위 漢文)를 만든 것도 동이족이요,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숙제(叔弟)까지도 동이족이다.

 

이 지도는 우리 조상인 동이의 나라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가

아시아의 동방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다.

 

이에 놀란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것으로 동이족이 한(韓)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자기네 조상이라고,「왜놈의 역사왜곡」보다 더한「뙤놈의 역사왜곡」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랑잎으로 해를 가리는 식의 치졸한 방식으로 저네들이 역사왜곡을 한다 해도, 자기들의 추악한 욕심만 드러낼 뿐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세계 석학들의 논문 중에서 동이가 우리민족의 조상임을 고증한 글과 그들의 업적을 모아 여기 실림으로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바이다.

 

 

(1) 서량지(徐亮之) 교수 :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

“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1) 장개석(蔣介石) :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은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고향이 옛날 백제(*대륙백제) 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진 설명> 왼쪽이 장개석, 가운데가 그의 부인 송미령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2-2) 임어당(林語堂):

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여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20세기 최대 학자 임어당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박사  .

 

▶ 안호상 :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에 문제가 많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 임어당 :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안을 당한 안호상 박사는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史記) (五帝本紀).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그는 이런 글도 썼다.

 

“4천 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묘족(苗族)은 오늘날 현재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묘족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치우천황을 기리는 정통 구전가요가 올라 있어 원문과 함께 번역해 실린다.

蚩尤挽歌 ( 苗族 傳統 口傳 歌謠 묘족 전통 구전 가요 * 오 소운 역)

千古奇才横空贤,천고기재 횡공현 천고기재 영웅이신 치우 천황을

可堪并论炎皇間。가담병론 염황간 염제씨나 황제씨와 어찌 비하랴

五兵刑法君始点 오병형법 군시점 5병기와 형법까지 친히 만드사

九黎生气冲云天。구려생기 충운천 구려백성 사기높여 충천케 했네

席卷中原华夏联,석권중원 하화련 중원땅의 하화연맹 쳐서 이기니

血染江河五千年。혈염강하 오천년 오천년의 강의물이 피로 흐르네

英名不因涿鹿败,영명불인 탁록패 탁록에서 패한것이 원인 아님은

老黑石山百花宣。노흑석산 백화선 흑석산의 고운꽃이 증언 하누나

 

 

예기(禮記)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묘족은 구려(九黎)의 후예다. 구려를 묘(苗) 민족의 선조로 삼고 있다.”

; 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 [禮記]

 

 

 

 

(4) 임혜상(林惠詳) 교수 :

홍콩대학의 임혜상(林惠詳) 교수는《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맹자가 말하기를「순(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舜)임금은 은(殷)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興起)하였다." (흥기 ; 흥하여 일어나다)

 

 

 

(5)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 :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그의 저서《고사변(古史辯), 192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조(玄鳥)는 은(殷)나라 사람과 동이(東夷)의 조상신이다.”; 玄鳥是殷人東夷的祖先神.

 

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小昊), 그리고 설(契)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6) 대만학자 노간(勞幹) :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 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 만일 이(夷)가 먼저 문화를 이루어 앞서 나갔다면, 이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사람 인(人)자는 전 인류적인 이름에 들 것이다.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려 쓴 것이다.”

 

 

 

(7) 중국학자 필장박(畢長樸) :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而係遠始于寒的北方.

 

 

(8) 일본학자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9)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 :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0) 소련의 역사학자 시로코고르프 :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오 소운 목사 : 대륙을 지배했던 우리민족의 역사가 분명 존재 하건만 백제가 대륙을 지배했다고 지나족 학자가 증언해왔건만

이 모든 사실에 눈감고 귀닫고 반도사관만 짖어대는 사학자들

치우천황은 있지도 않는 인물드립을 치다가 실존 인물로 밝혀지자 동이족의 원래의 뜻이 지나족이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르던 칭호였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 됐으니 우리는 동이족이 아니다 동이족은 우리민족이 아니다 드립 신채호 선생을 과대망상증 환자 쇼비즘이라고 떠들던 것처럼 우리민족이 대륙의 창대한 역사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외국학자들을 환빠라고 집단 정신병자들 이라고 말해봐 강단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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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자(선비) : 위 퍼온 글을 탐독하고 원작성자의 글 전체를 토대로 일부 재편집(첨언) 하면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 위의 글이 사실이라면 이는 너무 충격적이다.

-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원작성자의 취지를 공감하지만 민족의 자긍심 고취 및 방법을 좀 더 세련되게 하여야 한다.

- 본인은 전문가도 아니고 실증적 증거를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위 글은 이미 오랜 기간 다양한 형태로 학계, 방송, 언론, 인터넷에서 거론되었던 내용이라 개인적으로는 위 글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는 부분에 비중을 더 갖고 있다. 따라서 국가, 민족의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 확립을 위해서 정부차원에서 사실 확인에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 역사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고서적(古書籍)의 수집 확보 필요함.

- 국내수집 : 개인, 기관 소장 고서적 수집.

*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다량 보관, 공개 거부하고 있음

* 사찰, 서원, 향교, 고택, 고문서 수집상 협조로 사본 확보

- 해외수집 : 외교적 노력으로 수집.

* 일본 황실소장 고서 [일제식민시대 약30만권 수탈 추정]

* 중국/대만 소장 고서 [진실을 알기에 역사 날조 감행]

* 서양 소장 고서 [비단길 교역시대, 식민제국시대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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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물시리즈 1편 (다물개론)  
역사의 되물림(多勿)을 위하여

1. 多勿槪論
다물이란 단어는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생소한 단어이다. 근래 들어와서 민족재야사학의 대두와 우리 나라 전통 전반에 대한 관심의 급증으로 더러는 이 단어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다물의 당위성 문제까지 거론되는 듯하나, 그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

"다물"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北宋시대의 史家인 司馬光의 저서인 자치통감(資治通監)에 麗語謂復舊土爲多勿, 즉 '고려의 말로 옛 땅을 찾는 것을 다물이라 한다'고 적혀있다.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다름 아닌 고토회복이다. 단군조선이후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던 고구려의 역대 제왕들의 목표는 예외 없이 "다물"이었으며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이라고 일컬어지는 廣開土大帝의 정복활동도 기실은 고토회복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창업주 이신 "고주몽 성제(聖帝)"의 연호가 "다물"이었다. 그것이 현실적인 목표였던 아니었던 간에 다물은 고구려 까지도 국시(國是)로서의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침략기에도 "다물단"이라는 반민족행위자 응징단체가 활약한 바 있다. 다물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통일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물"이라는 개념이 고대에서부터 근현대까지의 우리 나라 역사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정신이요, 사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서 단재 선생께서 염려하신 "무정신의 역사"의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하더니 고토를 다물하기는커녕 우리의 전반적인 정신적인 주체성 마저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國是로서의 다물은 조선조의 숭유(崇儒)정책으로 인하여 거의 말살위기에 몰리게 되고, 조선왕조 몰락 후 일제 침략기에는 민족종교들에 인하여 어느 정도 부각이 되었으나, 그나마 대한민국의 수립이후 극심한 좌, 우 이념 대립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반공, 경제발전, 또는 세계화들의 단어 등이 國是인양 행세를 하고 있다. 그나마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목표인 남북통일이 서서히 우리 나라의 국시로 정립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통일은 일단 성취되고 나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한시적인 목표라는 문제가 있다. 통일을 이루고 국가적 통합작업이 완성되면 이 나라는 한국 전쟁이후의 최대 국가적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 때문에 국시 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방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다물의 국시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다물을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추상적 토의 대상으로만 둘 것이 아니라, 국가적 목표로 전환시켜 실제로 성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필자의 이러한 생각을 과대 망상적 발상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국토가 곧 국부였던 시대는 지나갔으며, 현실적으로 지배자가 바뀐 땅을 다시 차지하려는 것은 침략주의적 발상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필자를 설복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예나 지금이나 국제 경쟁에서 강자가 약자의 처지를 존중하여 주고 패권추구를 비난하는 도덕주의가 우의에 있었던 적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제 정치에서는 힘과 국익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와 같은 자원빈국이 많은 천연자원이 있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국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로 나라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힘과 국익만이 국제 정치의 진리라면 국가의 최고 목표는 어디까지나 "富國强兵"이다. "다물"은 부국강병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자체가 부국강병의 精華이다.

그러나 국시로서의 다물은 불행한 현대사에 의하여 한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으며 다물의 꿈을 꾸는 사람들조차 귀했던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었다. 비록 강단 사학의 퇴조로 다물이란 개념이 어느 정도 부각되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물을 비현실적인 망상정도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나마 다물이라는 개념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故土恢復을 실현 불가능한 상상으로 생각하며 다물의 진취적인 정신이나 이어받자고 주장하는 소극적인 패배주의자들도 있다. 필자가 이 단상에 나서게 된 것은 더 이상 다물을 꿈으로만 방치해 둘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물은 꿈이 아니다. 거시적인 계획과 확고부동한 실행의지만 전제된다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잠재적인 현실'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 잠재적 현실을 글자 그대로 현실로 만들 것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다물 사업이 완성되어 만주, 黃河以北, 몽고, 연해주 그리고 동 시베리아가 대한민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날, 우리들은 그 옛 단군 조선의 영광을 되찾게 되는 것이며, 우리 한민족은 다시금 대륙의 주인이 되어 세계를 무대로 雄飛할 것이다.


다물시리즈 2편 (다물의 역사)  
2. 다물의 역사

필자가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다물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연원을 유추하여 보면 그 연대는 고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북아의 광대한 제국이었던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조선국의 지배하에 있던 수많은 지역을 상실하였는데 "되물림(多勿)"이란 구체적으로 바로 그러한 고조선 영역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조선 이후에 나타난 모든 국가들의 시조들의 목표는 하나같이 "되물림(多勿)"이었으며, 소위 정사(正史)에 묘사 되어 있는 고구려 제왕들의 정복 전쟁, 고려 태조 왕건의 북진책, 고려 말 명장 최영의 요동 정벌 시도 모두가 신천지(新天地)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 일련의 고토회복(故土恢復)운동 이었던 것이다.

가. 고대
"되물림(多勿)"이란 단어가 등장하게 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정사에는 다물에 대한 간단한 언급만이 있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까닭에,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野史를 조명해 볼 수밖에 없다. "되물림(多勿)"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해는 서기 기원전 590년이라고 在野史書의 대표格인 桓檀古記의 〈檀君世紀〉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檀君朝鮮 38대 단군의 이름이 "多勿"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는 단순한 연대기에 지나지 않기에 그 임금의 이름으로서의 "다물"만 등장할 뿐, 그 이름의 의미나 연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우리는 다만 〈단군세기〉의 기록을 통해 "다물"이라는 단어의 역사가 오래되었음만을 확인 할 수 있을 뿐이다.

단군조선이 멸망하자 그 천제의 통치하에 있었던 제후국들은 제각기 살길을 도모하였고 우리 민족사는 바야흐로 열국(列國)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고리, 구려,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주나, 황룡, 낙랑, 남국 등의 제후국들이 자립하면서 한반도, 만주, 북중국 일부지역 에는 그 유명한 춘추전국시대와도 같은 혼란기가 도래하게 된다. 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明滅하여 갔으며, 서로와의 투쟁에서 살아남은 제후국들은 강력한 독립국가로서 역사 위에 등장하게 된다. 이 가운데 최초로 이 전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통치를 행사하게 된 국가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해모수의 北夫餘이다. 그러나 북부여도 겨우 6대라는 짧은 역사를 끝으로 사라졌으며 다시 혼란으로 접어들어 갔다가 북부여가 쌓아 놓은 기반을 토대로 하여 다시 일어선 것이 고구려이다. 이 와중에서 상당량의 영토가 상실되었는데 고구려 건국이후 벌어지는 모든 정복 전쟁이란, 이때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 우리민족의 영역으로 되찾는다는 고토회복의 일환이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을 일컬어 우리는 "多勿"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國祖 高朱蒙은 처음에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부터 고구려의 국시(國是)가 "多勿"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고주몽의 의지는 正史인 〈삼국사기〉와 野史인 〈한단고기〉의 三聖記에 기록되어 있다.  

- 王 三年 유월 여름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그 땅에 봉하였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되찾는 것을 다물이라고 하였으니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

- 계해년 정월 봄, 고추모(주몽)는 역시 天帝의 아들이라 칭하고 북부여를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단군의 장사(제사)가 다시 일어나고 해모수를 太祖로 삼으며 자신의 연호를 "多勿"이라 하였으니 이는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라.
-〈桓檀古記〉(三聖記)

이 기록들은 "다물"이 언제부터 고토회복의 개념으로 확립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미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부터 지배층이나 帝王들의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고주몽은 이러한 이념을 건국의 기치로 내걸고 고구려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건국이념은 고구려에서 자자손손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빈민 구제제도인 辰貸法을 실시한 고국천왕때의 명재상인 을파소는 이러한 이념을 명실공한 국시(國是)로 만들기 위해 "다물 흥방의 노래"를 제작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는 사실이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쓴 太白逸史에 나와 있다. 다물정신이 한껏 고양된 고구려는 이로 인하여 그 역사를 통틀어 대외 지향적인 정복 국가로 행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고구려의 통치 계급이 자기네들의 정복 정책에 민중들을 동원하기 위해 선전선동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선전선동 역시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이념이나 개념을 활용한 행위이며 이는 국가의 최대 목표는 언제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자치통감〉의 기록도 이러한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자치통감〉은 북송(北宋)의 司馬光이 북송 이전의 중국사를 총정리하여 집필한 사서이며 북송은 고구려가 멸망 이후 약 300년 후에 세워진 국가이다. 고구려의 대외지향성과 진취성, 그리고 호전적인 기상은 중국인들에게 뚜렷이 각인 되어 수 백년이 지나도 그 국가의 정사에 기록될 정도로 강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물"은 결코 고구려 一國에만 국한된 이념이 아니었다. 그 정신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들인 百濟 始祖 온조에 의해 백제에도 이어져 백제 역시 정복국가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小國)이었으나, 사실 진정한 백제의 모습은 그 유명한 카르타고와 같이 해상을 무대로 주름을 잡았던 거대한 해상 제국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삼국/남북조의 혼란기를 틈타 중국 동해안에 진출하여 광대한 식민지를 획득한 사실은 이미 중국 남조들의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국사교과서에 까지 명시되어있다. 이러한 백제의 진취성과 대외지향성도 모두 "다물"이라는 이념에 기초하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다물"은 이와 같이 진취적인 이념이었으며 '태평성대'나 '문치(文治)'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다.

"다물"이라는 이념의 원조격인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기타 국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구려를 이은 大震國 渤海는 애초부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건국이 되었으며 그 사실을 大震國 三代 황제인 무제(武帝)대무예가 일본의 성무천황(成武天皇)에게 보낸 국서에서 잘 드러나있다. 그 국서에서 자신을 '고려의 황제'라고 칭하였음은 대진국이 누구를 계승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 대진국도 11대 황제인 선제(宣帝)때까지 쉬지않고 정복책(고토 회복책)을 폈으며 그 기반은 역시 고구려로부터 이어받은 "다물"이념이었던 것이다.

나. 중세
北國 대진국 발해가 226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멸망한 후 역시 우리민족의 계통으로 간주되는 여진의 금제국(金帝國)이 몽골의 징기스칸에게 멸망당하고 나자 滿洲라는 우리민족고유의 영역은 원제국(元帝國)을 거쳐 明代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한족(漢族)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南國 신라도 후백제의 견훤에게 강타를 당한 후 국가를 지탱하지 못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하고 만다. 대진국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 시대가 종언을 고하자 이때부터 "다물의 개념"은 이전의 "고조선 영토회복"에서 "만주회복" 즉 "고구려 영토회복"으로 전환이 된다. 고려 태조가 북진주의자였다는 것은 기존 강단사학계에도 이미 인정이 되는 바이다. 高麗라는 국명 자체가 고구려에서 나온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는 후일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고려의 서희가 거란군 사령관인 소손녕을 상대로 담판을 지을 때 잘 드러난다. 왕건 자신도 北伐에의 의지가 있었기에 대진국 太子 대광현이 망명을 해 왔을 때 그를 후대(厚待)하고 거란에게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건국 초기에 대동강-원산선(大洞江-原山線)에 머물러있던 국경선을 청천강 유역까지 밀어 올라갔다. 아울러 자신의 유서(遺書)인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서경(西京)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매년 행차하도록 후대의 임금들에게 지시하였다. 그 이유란 태조 자신이 서경을 일종의 北伐 기지로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의 다물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사건이 있다. 다름아닌 仁宗時의 대위국(大爲國)운동과 고려말의 요동정벌이다. 대위국 운동은 기존 사학계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묘청의 난'이라고 일컬어지던 사건이다. 외척세도 정권을 획책하였던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이후의 고려 내정은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가까스로 난을 수습한 후에도 상당한 심리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인종(仁宗)에게 서경 출신의 승려였던 묘청이 접근하여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천도의 명분으로 개경(開京)의 지덕이 쇠하였으니 왕기(王氣)가 짙은 서경으로 옮기면 국운이 융성하여 36국의 조공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金國正伐)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한,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파와의 대결에서 패하면서 끝이 났다. 구한말의 유명한 사학자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 사건을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낭가(郎家)사상이 사대주의적 유가(儒家)사상에 패한 사건으로 규정지으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한 민족의 진취적 기상이 꺾이고 사대 사상이 민중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이를 "조선역사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고 명명하였다.

몽골 간섭의 암흑기가 지나간 후 고려는 공민왕의 자주정책을 펴면서 그 동안 침체되었던 국가 분위기가 고양되어 가고 있었다. 고려를 한 동안 괴롭혔던 왜구도 진포의 해전과 황산대첩으로 인하여 중대한 타격을 입고 수그러들었다. 공민왕은 이와 동시에 부계를 개혁하여 모든 제도를 문종 때의 제도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신돈을 통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 제도의 일신을 꾀하였다. 이는 그 동안 고려를 내정 간섭하여 왔던 몽골의 元朝가 멸망함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이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등장한 명조(明朝)는 느닷없이 고려의 쌍성총관부 수복을 트집잡아 이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하였다. 당시 고려의 명장 최영은 이러한 일방적인 통고에 분개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38,000의 요동정벌군을 소집하여 이성계, 조민수를 각각 우, 좌군 도통사로 삼아 요동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우왕과 최영을 축출한 후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감행하여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다물 사상과 관련이 깊다. 고려가 요동 정벌군을 소집하자 명조(明朝)는 그들의 정치적 공갈이 효과를 보지 못하였음을 인정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명의 위협이 사라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 기회를 고토회복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는 요동, 그리고 더 나아가 만주라는 땅이 자국의 실지(失地)였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만주가 남의 땅이라고 보았다면 요동정벌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다. 조선과 근·현대
민족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조선왕조와 그 태조인 이성계에 내리는 평가를 보면 매우 부정적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왕조는 시종일관 사대주의로 점철된 "의식 없는 시대"였으며 그러한 사대주의는 이성계 자신의 정치관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거부하고 回軍을 정당화시킨 명분인 사불가론(四不可論)중의 하나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불가'라는 대목에서 여름이라 비가 와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돌 수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出兵의 시기를 가을로 늦추어 달라는 요청은 요동정벌의 반대 이유가 이념적이 아니라 전략적, 또는 방법론적인 차원의 반대임을 엿 불 수 있다. 아울러 그 후에 북벌군의 양성에 주력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대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도 고토회복의 의지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왕위를 양위할 후 연이어서 일어난 1,2차 왕자의 난으로 북벌을 위하여 양성되었던 병사들은 모두 정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뒤이은 태종의 의흥삼군부 혁파와 사병금지는 태조의 모든 노력을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았다.

태조 이후 조선에서는 특별한 고토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는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등 일견 민족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도 고토회복을 위하여 군을 양성한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예종과 성종은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자주적 사서들에 대한 수집령을 내리고 그러한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하여, 세조 이후 지배층의 의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명종조에 시작되는 동서 당쟁, 그리고 조선을 강타한 임진, 병자 양난(兩亂)은 각각 조선의 의식 세계를 마비시키고 황폐화 시키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지난 후에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북벌시도로 알려진 孝宗의 북벌 계획이 있었으나 이것은 청에 대한 복수전쟁 준비 성격이 강하여, 효종이 과연 고토회복의 의지를 지니고 북벌을 결정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양지(陽地)에서의 다물론은-적어도 조선왕조에서 만은-그 초기를 제외하고는 전무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물론으로 대변되는 진취적 기상이 사라진 조선은 국가의 근본정책인 부국강병을 도외시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부국강병에 필수적인 체제의 개혁, 경제의 발전, 상공업의 활성화, 기술의 진보, 군사육성 등을 등한시하여 정인보 선생이 지적한 '가론(可論) 당쟁'이요, '가론 세도'요, '가론 살육'의 욕된 역사를 남긴 채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물론의 진취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국내외 에서는 우리 나라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이 일어나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천도교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3·1운동의 중추세력의 하나였으며, 大倧敎는 만주 독립군들의 물리적,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 침략기 동안 해외에서 활동한 단체 "多勿團"의 존재이다. 이는 "의열단"과 유사한 파괴조직으로서 대일 테러활동이나 반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단에 앞장 섰으며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이 이 단체와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물"이라는 개념이 비록 조선조에서는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못하였지만, 정치적인 탄압에도 소멸되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왔음을 입증하여 준 것이다.

 

[우리는 대륙 백제의 고토를 수복해야 합니다!]
산동, 천산, 양자강에 이르는 백제의 고토를 보라!



대륙 백제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우리의 고대사를 온전히 밝히기 어렵습니다. 영토적 고토수복이 아니라 정신사적 고토수복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백제의 대륙지명을 통해 우리는 옛 고조선의 강역까지 분명하게 파헤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백제의 대륙역사에 관심을 가져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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