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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지설산(半脊雪山) 개요 및 등반 루트 소개   

 

반지봉은 해발 5,430m로 중국 사천성 아빠티벳족 자치주에 있다. 사천성 수부 성도시와 250km 거리로 차량으로 7시간 좌우 소요된다. 베이스 캠프는 상해자(上海子)에 설치된다. 상해자는 비평구의 공로가 통하는 종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발고도는 3500m이다.   베이스에서 윗쪽으로 300m 이동하면 오른쪽 정상부근의 빙하를 볼 수 있고 계곡을(溪谷沟) 따라 위쪽으로 등반로가 이어지고 있다. 계곡과 공로사이엔 완만한 층적지대이고 위쪽부터는 산림지대가 이어지고 있다.

 

비펑구 내엔  인적이 없는 곳이라 약초꾼들이 다니는 오솔길이 나 있을 뿐이어서 눈이 온 상태엔 꼭 도로표시를 명기해야 한다. 산림지대를 넘어서면 왼쪽으로 소막(牛篷子)이 있고(4,000m) 이곳에서 계곡의 오른쪽으로 너덜지대를 통해 직접 빙하로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40도의 경사면이라 난이도가 크다   산림지대 좌측의 너덜지대, 관목림을 지나면 등반루트가 훤히 보인다. 좌측의 4,462m의 산을 참조물로 해서 몇 개의 언덕을 지나 축구장만한 평평한 지대가 나오는데 이곳이 Camp 1이며, 30동의 텐트는 칠 수 있다.

 

베이스에서 이곳까지 4-6시간정도 소요된다.   식수는 눈이 녹아내리는 계곡물로 쓸 수 있다. 부근에는 너덜지대와 약간의 초지가 있다.   Camp I 과 Camp 2 구간에는 눈이 없으면 이동하기 쉬우나 눈이 내리면 발이 자주 돌 틈에 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산고개까지(4,850m) 경사가 40도나 되고 눈사태가 잘나는 곳이다.  우리가 갔을 때는 Camp 2까지 중 약 300m의 구간이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어 애를 먹었던 구간이다. 산  언덕에 올라서면 좌측 C2로 이동한다. 오른쪽은 빙하의 끝부분이고 아래는 전부 너덜지대이다.  빙하와 능선의 결합부사이로 몇 개의 언덕을 넘어  C2(5026m에 도착한다. 여기엔 수 십동의 텐트를 칠 수 있는 경사면이 10도쯤 되는 평지가 있다. CI 에서C2까지는 약 5-6 시간  소요

  반지설산(半脊雪山·5430m)은 유비가 촉 나라의 부흥을 위해 거점으로 삼았다는 쓰촨성(四川省)의 중심도시 쳉두(成都)를 기점으로 한다. 쳉두는 험한 산과 계곡이 가로막은 거대한 분지로, 유비도 그런 지형적 이점을 살려 촉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중국의 지붕 같은 고원지대는 중서부 중앙아시아 지역에 몰려있으며 히말라야 산맥을 비롯한 티베트 고원지대뿐 아니라 쿤룬(崑崙)산맥, 아얼진(阿爾金)산맥, 총라이 산맥 등 6000m급 이상 고봉들이 몰려있는 대 산맥들은 모두 중국 중서부지역을 쳉두를 중심으로 동서로 가로지르며 솟아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반지설산으로 가는 거점이 되는 해발 2000m의 ‘리현’은 좡족자치주 지역으로 쳉두에서 250km 거리에 있어 차로 이동하는 데만 7~8시간이 걸린다.  베이스까지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해 짧은 기간에 고산등반을 원하는 우리팀에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등반은 베이스캠프로부터 1000미터 고도를 올라 4450미터 지점에 캠프1을 설치한다. 캠프1까지는 트레킹 수준이며 캠프2로 오르는 길은 고도차 500미터지만 모레인 지대를 통과해야 하므로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모레인 지대가 끝나고 약 300미터는 설벽을 올라야 하므로 크램폰이 필요하다.


  5030미터 지점에 캠프2를 설치한 후 정상까지는 전문 등반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하산을 위해서 100미터 로프와 스크류 4~5개, 스노바 2~3개, 하켄 1~2개가 소요된다.

 

 

 

 

 

 

 

 

 

 

 

 

 

 

 

 

 

 

 

 

 

 

 

 

 

 

 

 


(산행기1)


중국 쓰촨성  반지설산 半脊雪山


화이트아웃 뚫고 ‘대륙의 지붕’에 서다 글·사진 이영준 기자


▲ 캠프1 오르는 길에 바라본 반지설산. 오른쪽 눈 덮인 봉우리가 정상이다.

쓰촨성 주변 산은 어프로치가 짧아 짧은 일정동안 고산등반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당하다.


유비가 촉나라의 부흥을 위해 거점으로 삼았다는 쳉두(成都).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중심도시인 쳉두까지는 인천에서 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차츰 고도를 낮추자 오른편 창문 밖으로는 구름사이로 솟은 하얀 산의 모습이 펼쳐졌다.
반지설산(半脊雪山·5460m) 등반을 위해 함께 짐을 꾸린 강경중씨(타라그룹 회장)와 장기헌씨(타라그룹·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도 창밖 풍경에 사뭇 흥분되는 모양이다.
중국의 지붕 같은 고원지대는 중서부 중앙아시아 지역에 몰려있다.
히말라야 산맥을 비롯한 티베트 고원지대뿐 아니라 쿤룬(崑崙) 산맥·아얼진(阿爾金) 산맥 등 6000m급 이상 고봉들이 몰려있는 대산맥들은 모두 중국 중서부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솟아있다.
쓰촨성도 예외는 아니라서 쳉두를 중심으로 주변에 총라이 산맥 등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있다.
등반대가 계획한 반지설산은 절반 반(半)자에 등뼈 척(脊)자를 쓰지만 현지 발음으로 ‘반지’로 불리며 쳉두의 서쪽, 좡족(壯族)들이 사는 동네에 있다.
쳉두는 험한 산과 계곡이 가로막은 거대한 분지로, 유비도 그런 지형적 이점을 살려 촉의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쳉두에서 하루면 접근 가능한 반지설산

쳉두국제공항을 나서자 한국의 가을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쳉두는 경도가 방글라데시와 비슷하지만 중국은 경도에 관계없이 단일 시간을 쓰는 탓에 한국과 시차가 한 시간밖에 나지 않았다.
따스하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길가의 가로수들도 단풍이 들고 있었다.
마침 퇴근시간 러시아워와 맞물려서인지 숙소까지 가는 길은 교통체증이 심했다.
빽빽한 고층빌딩 사이로 줄지어 선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는 모습은 촉나라 생각만 했던 기자에게 중국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쓰촨성의 인구는 1억에 가깝다고 하고 쳉두에만 1천만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니 이정도 교통체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반지설산은 쳉두에서 250km 거리에 있어 차로 이동하는 데만 6~7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반지설산이 있는 삐펑고우(畢棚邱) 계곡 상해자(上海子) 마을로 가는 길은 관광지로 유명한 주자이거우(九寨溝) 가는 길과 맞물리기 때문에 단풍철을 맞은 관광객들의 차량이 많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일행은 새벽 일찍 쳉두를 벗어나기로 했다.
등반대는 강 회장과 장기헌씨 말고도 가이드 겸 정부연락관인 쓰촨성등산협회 소속 로로씨와 통역을 맡은 조선족 주건우씨가 더해져 다섯 명이 되었다.
로로는 오랫동안 쳉두 주변 고산지역에서 살아온 소수민족 좡족 출신으로 지금까지 무즈타그아타와 쓰구냥 등 중국내 많은 산을 올랐다고 했다.
도로는 우리에게 양자강으로 알려진 장강의 상류 민강을 거슬러 나 있었다.
한 시간여를 달려 차가 쳉두를 빠져나오자 민강 줄기는 부연 포말을 내며 거세게 흐르고 차는 계속 협곡 사이로 빠져나갔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왕복 2차선 도로로 굽이진 곳이 많아 속도를 내기는 힘들었다.
길은 도강구시에 이르러 쓰구냥산 가는 길과 갈라진 후 다시 문천에서는 주자이거우 방면과 갈라졌다.
주건우씨는 문천이라는 도시를 지나며 촉나라 오호대장군의 한 사람인 마초가 활동하던 무대라고 설명했다.
문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초의 고향인 무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천년 전 청운의 뜻을 품었던 장수들의 기세가 느껴지는 듯 했다.
반지설산으로 가는 거점이 되는 해발 2000m의 리현은 좡족의 도시였다.
중국 전역에 800만여 명이 살며 최대의 소수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좡족은 오래도록 산악지역에서 살아와 그들만의 생활 방식을 갖고 있었다.
쳉두를 떠나올 때만 해도 사람들의 복장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는데 리현에는 화려한 원색의 좡족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들은 한쪽 팔을 옷 밖으로 내놓고 15cm 이상 칼을 차고 다니는 것도 허용된다고 했다.
칼은 거친 고산지대에서 살아온 좡족에게 오래도록 생활필수품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리현 시장에서 등반 중 먹을거리를 구입한 후 반지설산 등반의 베이스캠프가 되는 상해자로 향했다.
리현에서 베이스캠프까지는 차로 1시간 거리다.
상해자 마을이 있는 삐펑고우 계곡은 고원 늪 등 풍경과 자연이 아름다워 등반대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상해자는 우리나라의 한계령 도로처럼 굽이진 길 끝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삐펑고우 계곡 초입에서 입장권을 끊어야 들어갈 수 있다.
입장료는 계절에 따라 달라 성수기인 5~11월은 1인당 60위안(한화 약 7300원), 비수기인 12~4월은 30위안이다.
매표소를 지나 곳곳에 산사태의 흔적이 있는 급경사의 길을 따라 빠르게 고도를 높였다.
베이스캠프는 3500m에 있었다.
상해자는 척박한 산과 가파른 협곡뿐이라 본래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삐펑고우 계곡이 관광지로 개발되며 좡족들이 이주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주로 등반대의 포터나 관광객들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상해자에서 만난 좡족들은 별다른 일거리가 없었는지 장작을 패거나 삼삼오오 모여 마작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캠프1 오르는 길. 4000m 지점까지 단풍이 우거지고 이후부터도 낮은 관목지대가 이어졌다.



고소적응이 반지설산 등반의 관건

등반에 앞서 주차장 한편에 있는, 관리사무소와 같은 곳에서 환경관리비와 환경보호비, 야영비를 내고 베이스캠프로 쓸 야영지를 배정받아야했다.
환경관리비와 환경보호비는 한 사람당 각각 60위안과 10위안, 야영비는 10위안이었다.
등반중 사고에 대비한 개인 신상도 함께 적어 내고난 후 반지설산에서 흘러나오는 너른 계곡 옆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몇 시간 만에 3500m까지 고도를 높였기에 고산증이 오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고소적응을 위해 해가 지기 전에 가능한 높은 곳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그동안 가이드 로로와 통역겸 쿡 주건우씨는 포터를 섭외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저만치 보이는 반지설산의 정수리에는 흰 눈이 빛나고 있었지만 베이스캠프 주변은 무성한 숲 지대로 동남아의 밀림을 연상케 했다.
반지설산이 초등된 것은 2003년에 쓰촨성등산협회 소속 마오파라는 산악인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숲속으로 난 길은 여느 등산로처럼 꽤 넓게 나있었다.
숲이 무성해서인지 높은 고도에도 다른 고산처럼 건조하지 않아 고소증이 덜한 것 같았다.
빈 몸으로 고도를 300m쯤 올린 우리들은 곧 해가 저물 것 같아 잠시 쉬었다가 되돌아 내려왔다.
반지설산 등반의 관건은 고소적응이기에 여유를 두고 운행하면 몸이 덜 힘들겠지만 오가는 시간을 포함해 7박 8일 일정으로 계획하고 온 것이기 때문에 고소증이 아주 심한 것이 아니라면 일정대로 운행을 해야 했다.
다행히 세 명 모두 머리가 조금 아픈 것 말고는 적응이 잘 되는 것 같았다.
상해자 마을에는 별다른 의료시설은 없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오토바이가 준비되어 있다.
고소적응이 힘든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아래 마을까지 내려가면 된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는 표고차 2천여m, 각각 4450m 지점과 5030m 지점에 고소캠프를 더 세우게 된다.
다음날 아침 일찍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우리들은 캠프1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제 다다랐던 지점을 지나 캠프1로 가는 길은 해발 4000m까지 울창한 수림이 이어졌다.
4000m를 넘어서도 빙하 모레인지대가 아니라 고원지대에서 볼 수 있는 낮은 관목들이 양탄자처럼 덮여있었다.
붉게 단풍든 숲길로 운해가 피어오르고 잔잔히 깔린 운해 사이로 맞은편 쓰구냥산 줄기가 나타나곤 했다.
캠프1까지는 포터가 동행했기에 무거운 배낭을 지지 않아도 되었다.
포터는 한 사람당 25kg의 짐을 지게 되어있다.
길은 급경사였기에 고소적응이 되어있는 포터들도 자주 쉬어갔다.
등반중인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광저우에서 왔다는 중국대가 한 팀 더 있었다.
개방 바람이 불며 중국도 등산·아웃도어 활동의 저변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 같았다.
중국의 산이 개방된 것은 1980년이다.
이후 차츰 생활의 여유가 생기며 중국인들도 여가활동에도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소득수준이 높다는 광저우에서 온 그들은 여느 전문산악인 못지않은 고가의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은 여가를 위해 산에 오르고 한 사람은 생계를 위해 그 사람의 짐을 진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리가 설악산을 오를 때 포터를 고용하는 경우가 아닌가. 가이드와 쿡을 의무적으로 고용하게 되어있는 것은 쓰촨성등산협회에서 정한 규정이지만, 초기 알프스나 히말라야 등반과 같은 모습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인프라가 발달한 시대에도 답습되는 것 같았다.
약 1천m의 고도를 올리는데 5시간이 소요되었다.
캠프1에는 반지설산을 전문으로 하는 상업등반대 회사에서 커다란 텐트를 쳐놓고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만큼 반지설산은 중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라는 것이었다.
날씨가 점점 흐려져 오후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캠프를 설치한 후 고소적응을 위해 가능한 높은 곳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눈은 밤새도록 내렸지만 아침이 되어서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 로로는 조금 더 기다리다 눈발이 잦아들면 등반을 시작하자고 한다.
그의 말에 따라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캠프1을 출발했다.
캠프2까지는 표고차 500m로 전날보다 수월했지만 모레인 지대가 시작되어 걷는 데는 힘이 많이 들었다.
모레인 지대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설벽이 시작됐다.
캠프2는 설벽을 200m 정도 오른 지점에 있었다.
로프가 필요할 만큼 경사가 급한 것은 아니었기에 크램폰을 착용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크레바스가 많지만 깊지 않고 대부분 열려있어 위험하지는 않았다.
캠프2에 도착해 텐트 1동을 치고 나자 저물녘이 다 되었다.

▲ 상해자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반지설산 전경. 베이스캠프 주변은 울창한 수림이 우거져있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반지설산 등정

로로는 다시 캠프1으로 내려가겠다고 한다.
등반에 앞서 준비한 로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5.5mm 케블러로프 50m를 준비했지만 로로는 그걸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신장력은 없지만 인장강도는 2톤 이상 되는 케블러로프를 처음 본 그는 그렇게 가느다란 로프로는 등반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등반루트를 자세히 본 결과 하강을 위해서라도 로프가 한 동 더 필요할 것 같아 그를 내려 보내고 눈밭에서의 첫날밤을 맞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 고산의 밤이다.
장기헌씨는 헤드램프 아래서 지난 원정의 무용담을 들려주며 “때로 이렇게 힘든 산에 내가 왜 와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어쩌면 그의 말은 수많은 산악인들이 몸을 던져온 알피니즘이란 것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알피니즘의 90%는 곧 정신이다.
추위와 배고픔, 척박과 위험밖에 없는 높은 산에서 알피니스트는 줄곧 풍요와 온기의 유혹을 받지만 시선을 정상에서 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사흘 만에 5천m 넘게 고도를 높인 우리들은 뜨듯한 온돌방과 자판기 커피 한잔을 생각하며 저마다 잠을 설쳐야 했다.
로로는 다음날 아침 일찍 올라오기로 되어있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옆 중국팀의 무전기로 수신된 내용은 아직 로프를 구하지 못했고, 히든크레바스가 많으니 절대 우리끼리는 등반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전날과 달리 하늘은 화창하게 개었다.
좋은 날씨가 아쉬웠지만 하루 더 그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저녁때 다시 무전기를 통해 들려온 말은 로프를 구할 수 없으니 등반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며 다음날 예정대로 등반에 나서겠다고 하니 로로는 다음날 아침에 캠프2로 올라오겠다고 했다.
저녁 무렵 붉은 노을이 물들더니 날씨가 급변했다.
아침부터 짙은 가스가 산을 덮어 사방이 화이트아웃이었다.
반지설산에 온 이후 가장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바람이 불거나 눈사태의 위험은 없었기에 등반을 강행하기로 했다.
정상까지는 460m만 올라가면 되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본격적인 등반에 나서야했다.
정상부 200여m 구간은 경사 60도 정도의 빙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피켈을 들고 빙벽 하단부까지는 각자 올랐다.
정상에 이르는 루트는 총 3개가 있었지만 낙석과 크레바스 위험이 적은 초등루트를 따르기로 했다.
장기헌씨가 앞줄을 묶고 오르고 강 회장, 기자가 뒤를 돌봤다.
크게 난이도 있는 구간은 아니었지만 악천후 속에서 혹시라도 실수를 한다면 큰 사고가 날지도 몰랐기에 주의해야했다.
정상까지는 50m 로프로 6피치를 끊어야 했다.
피켈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숨이 컥컥 차올랐다.
정상부는 간간히 히든크레바스가 있어 발디딤이 푹 꺼질 때면 머리털이 쭈뼛거리곤 했다.
등반을 시작한 지 5시간여 만인 2시 20분경 마지막 피치를 앞장서 오른 로로는 스노바를 꽂으며 “써미트”라고 외쳤다.
확보줄을 통과하고 기자가 올랐으며 이어 강경중 회장과 장기헌씨가 차례로 정상에 섰다.
화이트아웃 덕분에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은 하나도 없었다.
로로는 우리의 등정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반지설산 정상에 선 것이라고 알려줬다.
정상의 기쁨도 잠시, 이제 긴 하산이 남았고 스노바와 스크루 2개를 버리고 나서야 캠프2까지 걸어갈 수 있는 완만한 경사에 이르렀다.
등반의 성공이란 이제 무사히 하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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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ycmc&logNo=220016292533


고산등반 초보자의 중국 설산 등정기

참이상한 일이다. 2년 전에 고산등반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도 했고, 가족들에게도

이제는 해외원정은 나가지 않겠노라고 약속했건만, 마음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세계

7대륙 최고봉 도전이라는 명제가 주말산행을 하면서 움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을 운

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53세 중년의 나이에 내게 산행 스승이신 허창성 회장(진선평화출판사)의 권유로 코오롱

등산학교 정규과정(39기)과 암벽반(20기)을 수료하고, 연속하여 35일간에 걸쳐 백두대간

을 완주하고, 그 축하 모임 자리에서 이용대 교장에게 지나가는 얘기로 7대륙 최고봉에

도전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은 이후 ‘불가능한 도전은 없다’(두 기업인의 세계 7대륙

도전 성공기)란 책을 보내 주심은 순수 아마추어인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도전의 꿈을 심

어준 계기가 되었다.

▲ 5,300m 지점의 설사면에서 쉬고 있는 필자.

반지설산이시여, 나를 품에 안기게 하여 주소서!

다른 사람에 비해 고소증세를 심하게 느껴 7대륙 최고봉 도전을 결심하기에 앞서 우선

5,000~6,000m급 설산과 빙벽을 2~3회 경험하고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판단될 때 정

말 꿈에도 그리던 7대륙 최고봉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이 일환으로 장기헌, 이영준과 함

께 인천 발 성도 행 CA436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즐거움, 아니 태생적으로 타고난 기질 때문에 오늘 이 비행기에 타

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7대륙 최고봉에 도전하는 것은 명예나 부나 권력이나 또는 좋은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즐거움이나 쾌락 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것

이다. 그래서 이 도전을 나는 운명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 삶의 궤적에 ‘원래 너는 언제

어느 곳에서 그러한 여정이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성도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9월29일) 오전 5시55분 호텔을 출발, 시골 길가의 한 음식점

에서 묽은 쌀죽과 달걀, 도너츠(단맛은 없음), 콩물로 아침식사를 마쳤다(식사비 1인당 4

위엔). 산과 산 사이에 협곡을 이룬 민강(泯江)을 따라 작은 마을을 거치면서 길이 이어지

고, 추월하는 차들의 곡예운전으로 졸릴 틈도 없이 민천(泯川) 시내를 통과하여 오전 11시

10분경 사천성의 성급 풍경구인 미야뤄 단풍과 동방의 고성 도평강책, 피펑구의 자연 풍

경으로 유명한 사천성의 리현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식량을 보충한 다음 다시 차로 이동하는데 주위 경관이 너무 아름답다. 깊은

계곡을 거슬러 한참 오르니 갑자기 넓은 평원이 펼쳐지더니 조그마한 호수 뒤로 동양화에

서나 나올 법한 기암절벽과 붉은 단풍 사이로 여러 개의 폭포가 흰 물줄기와 함께 괴성을

지르며 밑으로 달려나온다. 맑고 깨끗한 하늘은 오지가 주는 신선함 그 자체다.

▲ BC에서 바라본 반지설산. 왼쪽에 낮게 보이는 게 정상이다.

BC(3,500m) 근처에는 상점 역할을 하는 목조건물의 민가가 여러 채 들어서 있고, 관리동

겸 식당으로 이용되는 조립식 건물도 보인다. 좌우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이 신비감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 도전이다. 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맹인에 불과하지 않

은가. 기업을 하면서 느꼈던 너무도 빠른 환경 변화와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무

한 경쟁과는 달리, 자연은 항상 있는 그대로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변화할 뿐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미지의 자연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그래, 한 번 해 보자!

9월30일. 역시 산악인이 되기에는 아직 풋내기에 불과하나 보다. 어제 3,800m 지점까지 올

랐다 내려왔는데 약간의 고소증세와 무언가 모를 몸의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잠을 설쳤다.

밤새 내리는 비 소리에 마음이 심란하여 텐트 속 호젓함을 만끽할 수 없었다.

오전 6시30분이 넘었는데도 바깥은 아직 개지 않았다. 짙은 안개 사이로 물소리만 요란하

게 들릴 뿐, 3~4m 앞을 분간할 수 없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중국인들의 느린 동작

때문에 오전 9시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이 산이 최근(2004년)에 초등이 이루어졌기 때문

인지 포터들도 히말라야와 비교가 되었다.

길은 굉장히 가팔랐다. 우리 뒤에는 광쩌우에서 온 남녀 6명이 따랐다. 하루에 근 1,000m

의 고도를 올라야 함에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복식호흡을 하면서 발걸음을 떼었다.

▲ BC에서 고소적응차 C1으로 향하는 필자.반지설산 일원의 하얀 산들이 반짝이고 있다.
C1(4,454m)에 도착했으나, 날씨가 예상보다

좋지 않다. 죽을 먹고 1시간 가량 쉰 다음 고

소적응 차 또 올랐다. 간간이 비와 우박이 번

갈아 머리 위를 때린다. 4,600m 지점을 넘어

서니 바위로 이루어진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바위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매우 조심스러

웠다. 몇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숨이 가빠온

다. 연신 복식호흡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에 나의 의지를 시험해 본다. 머리 위 구름 사

이로 가끔씩 나타나는 만년설이 나를 설레게

한다.

하얀 눈 위에 캠프를 친다는 설렘에 비록 호

흡은 가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

었다. 오후 5시경 큰 바위 지대에서 20분 정도

휴식한 후 C1으로 하산하였다. 언제나 하산

은 지루하다. 더욱이나 너덜지대를 지난다는

것이 짜증스럽기조차 하다. C1에 도착하니 장기헌씨(이후 장 대장)가 컵라면을 준비해 놓

았다. 고소 때문인지 별로 입맛이 돌지 않는다. 그래도 뜨거운 국물에 몸이 따뜻해지는 느

낌이 든다.

텐트로 돌아와 윈드스토퍼 바지와 우모복으로 갈아입고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고 얼굴에서 열이 나더니 추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밤 고소증 때문에 고생할

걸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난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소내의를 더 껴입고 침낭 안으로 들

어가 몸을 웅크렸으나 여전히 춥다. 오늘 저녁도 한 숨 못 자고 두통과 추위에 떨어야 하

나.

저녁식사 후에도 약간의 두통기운이 있어 쑥찜 팩을 하고, 진통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

다. 약 기운인지 어제보다 훨씬 잘 잔 것 같다. 중간 중간 텐트 위로 떨어지는 진눈깨비 소

리에 오전 5시경 눈을 떠서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6시30분 자리에서 일어

나 C2(5,026m)에 가지고 갈 짐과 C1에 남겨야할 짐을 정리했다. 여전히 텐트 밖으로 진눈

깨비 소리가 마음을 어둡게 한다.

누룽지로 아침 식사를 했는데 꽤 맛이 있어 두 공기를 비우고 커피 한 잔까지 하니 이 이

상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오전 9시경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산행 가이드가 기상이 나빠 오

늘 하루 더 C1에서 머물고 내일 떠나자고 한다. 우리에게 예비일이 하루밖에 되지 않아

만일 내일 C2로 올라갔다가 모레 날씨가 좋지 않으면 부득불 정상에 올라서지 못하고 하

산해야 된다. 그래서 오늘 C2로 가야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가이드는 점심때쯤 기상

상황을 봐가면서 결정하겠단다. 어쩔 수 없이 텐트 안에서 기다릴 수밖에…. 그러나 눈은

더욱 많이 내린다. 세상을 그렇게 모질고 나쁘게 살지 않았으니 날씨가 좋아지리라 자위

해 본다.

오전 11시경이 눈이 잦아들어 20분 뒤 C1을 출발할 수 있었다. 어제 고소 적응을 위해 올

랐던 길과 똑같은 길이건만 숨이 가쁘다. 거기에다 거센 바람과 눈까지 내린다. 오후 2시

쯤 빙벽 구간이 나와 아이젠을 착용하기 위해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포터가 아이젠이

없어 바위쪽으로 가다가 그만 큰 바위를 건드리고 말았다. 집채만한 바위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장 대장과 나는 “악!” 소리와 함께 큰 바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우리가 몸을 숨겼던 큰 바위 몇m 전에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멈춰 섰고, 우리

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정강이가 아파온다. 급히 몸을 날려 바위 뒤로 숨을 때

바위에 부딪혔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정도 상처라면 웃으면서 아픔을 달랠 수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500m쯤 더 가면 될 거라고 했는데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고, 하얀 안개 뒤

로 설빙만이 펼쳐진다.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그 동안의 수많은 산행 경험을 통해 얻지 않았던가. 오후 3시40분경 드디어 C2가

큰 크레바스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오늘 산행

의 어려움을 대신했다.

5,000m 정도의 고도이건만 현재로는 BC나 C1보다 고소증세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내일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까지 제발 이 상태가 유지되길 기도해 본다. 역시 쉬운 일이라곤 하

나도 없다. 나에게는 가장 취약한 고소적응이 그렇게 쉽게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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