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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주몽>이 5월부터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재미있는 드라마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상황설정과 지나친 극적 구성으로 실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에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대사의 고리를 고스란히 복원시켜주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드라마 <주몽> 시대의 역사를 알아보고 한민족 상고사의 국통맥을 간추려 소개한다.
 
 
 
어린시절 주몽은 겁쟁이?
 왜곡의 한 예로,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의 인물됨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주몽은 ‘기골(氣骨)이 뛰어나 범인과 달랐으며, 불과 일곱 살이 되어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나온다. 그래서 ‘(동)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에(善射者謂朱蒙) 그를 또한 주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주몽은 나이 스물이 되도록 활은 고사하고 칼 한번 들어보지 못한 겁쟁이로 나온다. 극적 전개를 위한 각색이라고 해도, 고구려 창업군주의 인물됨을 왜곡하는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드라마 <주몽>이 한민족의 상고사 특히 부여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천제지자(天帝之子) 고주몽     
 
근래 TV 사극은 옛사람들의 정신의 맥과 한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측면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야비한 다툼만을 부각시켜서 드러내는 경향이 짙다. <주몽> 역시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로,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정치사, 전쟁사로 몰아가는 문제점이 있다. 고대 인물들이 현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주몽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주몽이 영특하고 대범하고 영웅적인 기개가 있으니, (동)부여국 왕자들이 주몽한테 왕위를 뺏길까봐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주몽이 도망을 가다가 엄리대수(淹利大水), 즉 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 되는데, 뒤에서는 (동)부여 군사가 주몽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다.
 
 그 때 주몽이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나는 천제 즉, 상제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 이런 뜻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상제 문화, 천자문화가 생생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태왕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도 우리 고주몽 태조께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요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쓰여 있다. 그 말은, 당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대행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夫餘)사
 
이제 구체적인 역사 내용을 논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여사의 왜곡으로 인해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인 불리지(일명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과 해모수가 부부인연을 맺은 것으로 설정하여, 유화부인이 시증조할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런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
드라마에서는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원시)부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 수많은 부여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시청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몽이 태어난 나라는 ‘동부여’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 단군의 고손자로서 황손(皇孫)이다.(『삼국유사』도 분명히 해모수가 북부여의 건국자임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했던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과 국내사가들의 중국사 베끼기 |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잘 모르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에 기인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다 언급하기 힘들지만, 중국은 한(漢) 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이후로 동방의 천자국(天子國), 스승의 나라, 조선(朝鮮, 고조선)의 역사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은 세상에서 아는 것과 달리 하나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국 아래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일종의 연방체제로 이루어진 대제국이었다. 조선이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단지 제후국의 이름만 거론하면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후세의 김부식과 같은 우리의 역사가들은 중국인들이 써준 역사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탓에 우리의 역사, (고)조선사는 실체가 없는 신화로만 남게 된 것이다.
 
 (고)조선사를 역사 속에서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여사 또한 지우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 계승은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거쳐서 열국시대와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시대(대진국·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게 되는데, 북부여를 역사 속에서 지우면 뒤에 생겨난 국가들은 (고)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노렸던 것이다.
 
 
 
읽어버린 부여사
 그럼 구체적으로 부여의 정체를 풀어보자. 이것이야말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동양 한민족사의 실체에 얽힌 중대한 비밀코드를 풀어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역사 |
부여의 원뿌리는 (고)조선(朝鮮)이다. (고)조선은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나라를 크게 진한(辰韓, 후기엔 진조선) 번한(番韓, 후기엔 번조선) 마한(馬韓, 후기엔 막조선) 셋으로 나눠,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번한 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어 일종의 연방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삼한 안에도 더 작은 제후국들이 존재했다.
 
 
대부여의 등장 |
44대 단군은 구물(丘勿)단군이다. 그는 본래 43대 물리단군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43대 단군 때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 사냥꾼들을 모아 반역을 저질렀다. 그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물리단군이 피난 중에 죽자, 이에 맞서 반란자들을 제압한 이가 바로 상장군 구물이었다. 이에 5가(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 5인으로 구성된 조정의 주요 대신(大臣)들) 제신들은 그를 44대 단군으로 추대하게 된다.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개원(開原), 단군 44대~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고)조선의 종통은 보전하고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요컨대 (고)조선의 국호가 부여(대부여)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고)조선의 국통은 다름 아닌 부여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제식민사학을 답습한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과 부여가 어떤 관계이며, 또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어떻게 국통맥이 이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북부여의 등장 |
(고)조선 말기인 대부여로 오면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군권이 독립되고, 진조선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군웅들이 할거하며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는 50여년에 걸친 치세에도 결국 이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고, 5가 대신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은거하게 된다.(BCE 238) 이로써 2,096년간의 (고)조선은 막을 내리고, 5가(五加)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고)조선의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세력을 키우면서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5가 제신들의 추대로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다시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게 된다(BCE 232). 이렇게 대부여의 국통은 북부여로 이어진 것이다.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해모수도 ‘단군’으로 호칭했으므로, 해모수 단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에는, 북부여가 ‘대부여’ 곧 단군 (고)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
그러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3대손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옛날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 하여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의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삼신문화가 전수된 정신사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직계조상과 후손으로서 혈통줄을 타고 계승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는 엄밀히 말해서 동부여이다. 그런데 해부루가 다스렸던 동부여는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의 전한(前漢)과 국경을 맞대고있지도 않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도 없었다. 동부여는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여에 의해 막혀 한나라와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드라마가 상정하는 그 자리에는 사실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 동명성왕 고두막한
 
또 드라마에서 볼 때 전한(前漢)이 매우 강성하여 부여 국내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은 북부여의 국통을 잇게 되는데, BCE 58년 고무서 단군이 죽자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북부여의 6대 단군인 고무서(高無胥)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소서노는 그의 아들 온조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니까 소서노는 드라마에서처럼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본문에서조차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 후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단지 일설로만 연타발의 딸일 가능성을 주를 달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나라의 국통맥을 치졸하게 끊어놓는 것이다. 연타발은 고구려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BCE 200년경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킨 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의 세력에 쫓겨 (고)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의 변방으로 피난을 와 있다가 BCE 194년 번조선 왕조를 강탈하게 된다.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 무제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인해 번조선 위만정권도 막을 내리게 된다.(BCE 108년)
 
 한 무제는 계속해서 번조선 일대와 북부여의 서쪽변방으로 침략을 하는데, 이 때 서압록(요하)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가는 곳마다 격퇴하여 민심을 크게 얻게 된다. 고두막한은 또한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민심과 혈통을 바탕으로 북부여 4대 고우루 단군을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개칭하게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주몽이 아니다. 또한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도 아니다.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인 것이다. 그가 바로 북부여 5대 단군이며 고주몽의 장인이 된 6대 고무서 단군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물론 주몽이 ‘동명부여’(졸본으로 도읍을 옮겼기에 졸본부여라고도 함)를 계승하였으므로,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참고로,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를 이어 그의 동생 해부루가 5대 단군으로 먼저 즉위하였으나, 고두막한에 쫓겨 동쪽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나라를 옮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부여의 시작이다.)
 
 고두막한의 태양 같은 의기와 충의에 힘입어 사실상 한나라는 조선의 고토에서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가 번한의 영토 부근에 한사군(낙랑, 임둔, 현도, 진번)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나 고두막한을 필두로 한 민중의 뜨거운 저항으로 조기에 무너지고 만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제 이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혹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의 맥은 정신사에서…
 
이상의 내용은 주로 한민족의 정통도가사서를 묶어 편집한 『환단고기』 내의 「단군세기」,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런 사서들은 한양조선 시대조차 중국에 사대하는 풍토로 인해 금서로 묶여 있었다. 흔히 강단 사학자들이 기존의 역사 서술구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역사 서술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참역사는 정신사를 알아야 한다. 왜 고주몽 성제는 최초의 연호(年號)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던가? 다물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회복하다’, ‘되물리다’는 뜻을 가진 한민족의 고어(古語)이다. 고주몽 성제는 (고)조선의 역사적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혈통적 정신적인 연계성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역사 기술 풍토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참 역사는 고조선이 나라를 다스렸던 근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한민족 역사는 단순히 청동동검과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유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이 스테인리스 그릇이 아닌 토기에 음식을 해먹었더라도 오히려 오늘날 인간보다 훨씬 더 수승(殊勝)한 인간적 덕성으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사(先史)시대라 하여 반 짐승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도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 <주몽>! 무척 재밌다. 하지만 그 내용이 역사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낸 것은 아니다. <주몽>을 보되, 우리 민족의 참 역사를 재발견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더욱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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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슬픈 장례식의 기록

            - 왕비암살과 알려지지 않은이야기들

            - MBC 시사매거진 2580, 13일(日) 오후 10시 35분 방영

          

                    

1. 칼은 왜 신사에 보관되었는가

        - 일인 자객<명성황후의 시해>를 참회합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자객에 의해 사용된 칼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일본인 자객 토오 가쯔아키는 본인이 사건 당시 사용한 칼을 신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 사진 1>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사용된 토오가쯔아키의 칼, ‘히젠도(肥前刀)라고 불린다.  사진 = 혜문스님


그러나  이칼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연유에 대해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쿠시다 신사에서 수킬로 떨어진 거리에 센신원(節信院)이란 임제종(臨濟宗) 계파의 절이 있었다.  이절에 방문해서야 취재팀은 칼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 2 > 센시원의 전경  사진 = 혜문스님


“ 토오의 친척되는 분과 이절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오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참회하고, 칼을 이곳에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는 칼과 같은 흉기를 맡을 수 없기 때문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신 관음불상을 시주 받았지요.  ”


사찰 관계자인 요시코 여사는 시종 진지한 어조와 미안한 듯한 표정을 한 채 조심스레 설명을 이어 갔다. 

 

 

<사진 3> 토오가 세운 관음상. 명성황후의 얼굴을 참조로 만들었다고 전해짐

            사진 = 혜문스님

 

 

<사진 4> 관음상의 유래를 적은 비석            사진 = 혜문 스님

 

그녀가 안내한 마당 한쪽 석조 관음상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관음상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 있었다.


“1895년 민비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있었다.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죽어간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독지가들이 세웠다 ”


비석은 아무 말없이 회색으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착잡한 심경에 잠겨 있던 우리들에게요시코 여사는 다시금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 저도 왕비암살사건에 대해 공부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왕비를 그렇게 무참하게 ...  토오도 많이 괴로워 했습니다. 노년에는 세상을 등지고 거의 수도승처럼 살았죠.  당시 사건에 연루된 후손들도 가끔 이곳을 찾습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괴로워 했다고 하더군요 ”


 

2. 시해사건이 부른 피의 복수 - 이토오 히로부미의 암살

 

명성황후의 시해에 참가했던 자객들은 이렇게 스스로의 죄과를 뉘우치고 있었다. 근심스런 표정으로 나즉히 나즉히 관음보살상의 내력을 설명하는 일본인 할머니의 얼굴 위로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의 얼굴이 겹쳐졌다. 국가 지상주의와 제국주의 팽창의 야욕이, 이렇게 평범하고 상냥한 한명의 개인을 전쟁의 귀신들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 졌다.


“왕비의 암살이 한국사람들에게 준 슬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쓰노다 후사코 여사도 일본의 왕비암살은 역사의 참극, 복수의 피바람을 불렀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를 저격하며 그랬다는 군요.‘왕비의 복수’를 위해 이토오를 쏘았노라고... 결국 피는 피를 부르는 거겠지요 ”


피는 피를 부른다... 백범 김구의 일대기가 스쳐갔다. 황해도 해주의 평범한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본명)가 파란의 일생에 접어든 이유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인의 만행에 분대한 청년 김창수는 일본인 군인을 타살(打殺)하고, 사형을 언도 받고 감옥에 갇힌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옥한 김창수는 독립운동에 투신, 임시정부 주석에까지 취임하게 되는 것이다.


 

3.지금의 한일 문제를 생각한다

             -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앞에서

 

 

<사진 5>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그는 시해사건의 주모자이자 주동자이다.

            사진 = 혜문스님

 

오카모도 류노스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국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오카모도의 이름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 많다. 그가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음모를 꾸민 사람이고, 대원군을 납치 하고, 사건현장에 훈련대를 동원함으로써  조선의 내분으로 왕비가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려는 계획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은 도쿄 혼몬지라는 곳에 있었다. 이곳은 재일교포 역도산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역도산 무덤으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약간 들어가면, 나무그늘져 음산하고 으시시한 귀퉁이에 오카모도의 무덤이 있었다.

 

 동광(東光) 오카모도 유노스케

 

동광- 평생을 정치공작에 힘써온 그의 일생을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기초를 놓고 있었던 시기.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그 사람이 살아간 문제의식을 그대로  노출시킨 단어였다.

무덤에는 찾아온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누군가 수년전에 향과 초를 피운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자손이 없는 듯  수년째 아무도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의 심장을 찌르겠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고,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오카모도.  국가는 그를 이용해서 조선을 파멸시켰고, 결국 그도 상해에서 궁색하게 죽도록 강요했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가 우국지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이 한몸을 바쳐도 좋다고 , 일본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활활 불태우고 싶다고, 자신에게 스스로 수없이 다짐했을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성공했을때,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민족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4. 명성황후의 시해 그리고 슬픈 역사를 되새기자

         -에조보고서 '나체 만든뒤 국부검사 사실'보고

                             

해방 61주년을 맞은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되돌아 본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놓고 일본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카모도의 무덤앞에서면 섬찟함이 느껴진다. 언제 또 어느 일본의 우국의 지사가 한반도를 차지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가 없다고 주장할 까 두려워서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의 왕비에 대한 기록이 아니 기억 조차  없다.  이번 취재에서 전문을 구한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왕비는 시해후 나체로 국부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평상시 남자들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왕비는, 죽어서 이국의 사내에게 나체로 발가벗겨졌던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전 8시경 고종을 알현하고 시신을 확인한 조선공사 미우라는 경복궁 녹산에서 화장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석유를 붓고 불태워진 명성황후는 시체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고종의 아관파천 등으로  연기되어  2년 2개월동안 치러지지 못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이 슬프고 기나긴 국상이었다.  그 아픈 국상의 기록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왕궁 안에  있다는 웃지못할 비극이 오늘 나로 하여금 무거운 글을 쓰게한다.

 

 

<사진 6>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발인반차도> 현재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

한영우, <조선왕실의궤>에서 사진인용

 

관련카페 http://cafe.daum.net/doorgatemoon

 

 


 

후기  명성황후의 죽음 그리고 슬픈 국상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반환운동을 시작합니다.

 

 지난 7월 7일 조선실록 오대산본이 93년만에 고국으로 되돌아 왔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봉선사 주지 철안)는 2004년 도쿄대가 오대산 사고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약탈의 경위와 소장목록을 조사했다. 그리고 반환운동을 추진하며 기존에 알려졌던 46책 이외, 중종실록 1책이 더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또한 환수위는 1913 오대산 사고 에 소장된 3000여책의 전적중 일본 궁내청왕실도서관에 ‘왕실의궤’오대산본 44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그중에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2년 2개월에 걸친 슬픈 국상의 기록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궁내청 소장 의궤 반환운동의 과정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리고 암살당시 사용된 칼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글은 MBC 2580 취재팀과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이 8월1일부터 8월 4일까지 일본 일정을 정리한 취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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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6] 일본, 부여의 아들

                      - 근초고왕, 야마도 일본의 건국시조인가? -


 

                                                              김운회(동양대 교수)


 

 

1. 부여 드라마


  드라마 ‘주몽’의 드라마 사상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부여를 일반인들에게 분명히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그동안 부여는 고구려의 위세에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으나 드라마를 통하여 부여의 많은 이야기들이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해모수와 금와왕의 우정이 드라마 ‘주몽’을 살려 드라마 초반의 인기상승에 큰 역할을 하였다. 어떤 드라마든지 첫 회가 중요한데 정평이 나 있는 한국의 중견 배우 들(전광렬, 허준호)이 이 드라마의 무게를 실어 주었고 그들의 검투 장면도 드라마를 살리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해모수로 분한 배우(허준호)의 카리스마에 반한 많은 시청자들이 해모수를 죽이지 말라고 극심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해모수는 자연사(自然死)할 수 있는 행운도 누리게 되고 자기와 유화부인 사이에 난 아들과도 대면할 수 있는 기적도 연출하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지속적으로 친한족 정책을 수행했던 부여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할수도 있지만 드라마 ‘주몽’의 작가는 금와왕과 주몽의 우정을 부각시킴으로써 범한국인의 일원으로 부여를 힘차게 끌어안고 있다. 물론 해모수와 금와와의 우정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부여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부여는 고조선만큼이나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서의 기록으로 본다면 부여는 고리국(코리국)에서 나왔으며 이 부여는 후일 제2 코리국 즉 고구려의 모태가 된 국가이기도 하다. 북한의 사학자 리준영은 범한국인의 조상으로 알려진 맥족은 고리국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를 연구한 북한의 탁월한 역사학자인 리지린 선생은 이 고리국이 바로 동호(東胡)라고 하고 있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1, 123쪽). 다시 말해서 동호(東胡)는 후일 거란과 몽골의 선조들로서 결국 이 동호로부터 고구려, 북위, 요나라, 금나라, 몽골대제국, 청나라 등이 나왔다는 말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동호는 요하(遼河) 지역으로 고조선의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있는 곳이기도 하고 쥬신족들의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온돌(구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요나라의 사서는 요나라가 단군왕검(텡그리옹군) 식의 통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국가임을 보여준다. 백제를 상징하는 구들, 구드리 등도 구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고 있다([특집4]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줄기차게 동호는 오랑캐의 대명사쯤으로 가르쳐왔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을 때 알타이에서 출발한 유목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한족(漢族)의 정체성이 견고화되는 한나라 이후를 기점으로 이들은 황하에서 현재의 베이징 - 요하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밀려 나간 것이 기원 전후의 사정이므로 이 시기에 요하에 터전을 잡은 나라나 민족이 우리의 뿌리에 가장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①]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

                      (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2. 험난한 부여의 여정 


  부여는 그 연원이 깊은 나라지만 자가 분열로 인해 형성된 고구려와 부족국가 또는 부족 연맹체 단계에 있던 다른 쥬신족들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음으로써 AD 2~3세기 이후에는 거의 만성적인 국가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부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친한족 정책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동 지방(남부여), 태백산지역(장백산 : 동부여), 반도 남부(반도부여),  일본 열도(열도부여) 등으로 끊임없이 보다 안전한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쉽게 말해서 부여의 분국(分國)이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남부여를 바탕으로 반도부여(백제)를 건설했겠고, 반도부여(백제)를 근거로 하여 열도부여(야마도 : 일본)를 건설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림 ②] 부여의 영역과 이동 


  부여는 AD 3세기 초 중엽에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그 주요 세력들이 남하하여 반도부여의 기초를 세우고(부여계의 2차 남하) 다시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시기에는 만주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지고(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102쪽), 백제는 한반도에서 왕성한 정복활동을 전개되고 있다(전라도, 낙동강, 황해도).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시기에 벡제의 근초고왕은 20여 년간 잠적하는데 이 시기(349~363)에 일본에서도 활발한 정복사업이 시작되고 있다(부여계의 3차 남하).


  백제 관련 연구자들은 “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부여 세력이 반도로 이전해온 것일 뿐이다.


  더욱 주목할만한 일은 이 시기(4세기)를 즈음하여 7세기 초까지의 일본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분(古墳)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야마도 정부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고 미마나(任那)라는 식민지 운영을 시작했다고 하고 있고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비족이 진씨(眞氏)가 되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진씨(眞氏)가 일본의 황족(皇族)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재위 : 346~375)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백제는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간 시기(『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와 일치하고 있다. 즉 북만주 지역의 부여는 거의 붕괴직전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여의 주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부여계 3차 남하).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무덤양식의 변화가 있다. 서울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즉 4세기 후반에 만주지역의 무덤양식이 느닷없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사를 연구한 홍원탁선생에 따르면 백제의 왕위는 166-346년 기간 동안 4대 개루왕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면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고 고이 계열(부여계의 2차 남하 세력)의 마지막 왕인 계(契)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근초고왕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진서(晉書)』를 포함한 여러 중국 사서들에서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여영(餘暎), 전지왕(典支王)은 여비(餘毗), 반유왕(畔有王)은 여경(餘慶), 개로왕(蓋鹵王)은 여융(餘隆), 무령왕(武寧王)은 여명(餘明), 성왕(聖王)은 여창(餘昌)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 29대 무왕(武王)부터는 부여장(扶餘璋)으로 부여(扶餘)씨로 기록하고 있다(『수서(隋書)』『당서(唐書)』).

 

  참고로 『삼국유사(북부여)』의 기록에는 “古記(고기)에 이르되 전한서에 宣帝(선제) 신작 3년 임술 사월 팔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게지역임]에 내려와서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 : sun)로 씨(氏)를 삼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집3], [특집4] 참고).  

 

 

3. 일본, 부여의 아들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이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일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면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오우진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처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으로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이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한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따라서 오늘날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일본인들이 야마도 정신(일본 정신) 또는 야마도의 혼(魂)이라고 하는 그 정신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정벌해서 조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진구황후가 활약한 시기를 비교해보면 다른 사서에서는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이라다께 목라근자 등을 보내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업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진구황후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백제전문가 이도학교수에 의하면, 『일본서기』에 근초고왕 당시 전라도 지역에 왜(倭)의 군대가 활동한 것(『日本書紀』神功 49年)도 사실은 근초고왕이 주도한 것이다고 한다. 결국 근초고왕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군대가 이동한 것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이 정복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져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보병전(步兵戰)으로는 불가능하고 대규모의 북방 기병(騎兵)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남 호남 등의 지역은 넓은 평원이 있어 기병전(騎兵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근초고왕의 업적으로 추정되는 일을 한 사람인 진구황후가 실존인물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문헌외에 진구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인물로는 3세기 왜 여왕 히미코인데, 히미코여왕의 업적과 진구황후의 업적의 실질적인 공통성은 하나도 없다. 히미코 여왕은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갈등이 심한 각 부족들간의 화합과 조화를 이끌어 내었던 영명한 군주였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39년, 40년, 43년의 기사는 히미코의 기사로 대체해두고 있다. 그러면 히미코를 진구황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정작 히미코는 진구황후와는 공통성이 없어 이 기록들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왕의 업적을 끌어다 놓은 것이다.


  필자는 이 진구황후는 근초고왕 + 히미코 + 사이메이천황 등의 모습을 하나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은 백제 구원을 위한 국가적 사업을 하다가 중도에 서거한 여자 천황이다. 일본인들이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사이메이 천황을 진구황후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초고왕 또는 그의 처족인 부여의 주류 씨족(진씨)이 가야계와 연합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여 고대 일본의 야마도 왕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구당서』에서는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백제와 일본의 기본 통치세력은 남부여계(南扶餘系)이고 이들 남부여계 씨족들은 결혼(結婚)을 통해 더욱 관계가 공고화된다.



             [그림 ③] 절대권력의 상징 오우진 능


  일본의 저명한 사가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오우진 (호무다) 이전의 천황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진무(神武)와 오오진(應神)은 동일인이라고 보는데 동일인을 굳이 모자의 관계로 둘로 나눈 이유는 당시 오오진이 너무 잔인하게 열도를 정벌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는 의도라고도 한다.


  미즈노유우(水野 祐) 교수에 따르면, 오우진․닌토쿠(오우진의 아드님) 왕조(카와치왕조)는 외래 민족의 세력으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왕조로 기본적으로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부여)으로 대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대륙의 사정에 대해서도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 1978)].

 

  그런데 오우진 천황이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眞氏)라는 것이다. 야마도 조정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오우진계의 씨족 이름이 진[眞, 眞人(마히토 : マヒト)]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백제의 친왕(親王)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신찬성씨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던 사람들은 오우진계의 천황들의 성은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라고 한다[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지문사 : 1982) 204쪽]. 특히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들은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함으로써 진씨 왕후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이기백․이기동『韓國史講座Ⅰ : 古代篇 』(일조각 : 1983) 37쪽].

 

  참고로 백제의 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계보(系譜)를 참고로 살펴보자. 이 그림은 2십년 이상 백제와 일본의 왕가 계보를 연구한 홍윤기 선생(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견해이다. 

 


       [표1] 백제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관계도
            (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61쪽 재구성) 


  [표1] 의 계보 표를 보면 개로왕(蓋鹵王 : ?~475)의 아드님이신 곤지왕자(昆支王子)는 두 손자를 한 쪽은 백제, 한 쪽은 일본에서 모두 최고 권력자로 등극시키고 있다. 그런데 곤지왕자가 활약하던 때는 장수왕의 침입으로 부왕(개로왕)이 세상을 떠나는 등 백제가 “회복 불능” 한 상태에 빠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근초고왕 때에도 상황이 비슷한데 근초고왕은 백제(반도부여)를 통치하고 근초고왕 자신 또는 왕비족(王妃族)인 진씨계(眞氏系)는 일본(열도부여)을 경영하였듯이, 개로왕의 죽음 이후도 곤지왕자의 가계를 중심으로 열도부여와 반도부여는 하나의 왕조를 형성하게 된다. 개로왕은 『삼국사기』에는 여러모로 나쁘게 묘사되어있지만  실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안간힘을 쓴 분이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백제와 일본의 왕가는 너무 얽히고설켜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를 정도로 친족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차라리 하나의 왕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반도부여의 성왕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가장 헌신한 분으로  열도부여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하여 최고의 존칭으로 부르고 있다. 마치 동명성왕을 부르는 듯하다.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테이칸 기시키(貞觀儀式)』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貞觀儀式』「園倂韓神祭」).”고 하는데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오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聖明王) 즉 남부여(백제)의 대표적 성군으로 부여의 부활을 꿈꾸다가 산화(散華)한 성왕(聖王)이다. 일본인들은 성명왕(聖明王 : 성왕)을 이마키노가미(今木神)으로 높혀 부른다. 바로 쥬신(Jüsin)의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반도부여의 성왕(백제 성왕)은 일본의 국신(國神)이다. (상세한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제1권 일본신들의 고향 참고)

  이러한 상황은 고고학적 발굴으로도 증명이 된다. 일본 고분문화의 특성은 반도부여가 한반도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AD 4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급격히 바뀌고 있으며 그 고분의 성격이 쥬신 즉 만주와 몽골 지역 등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실용적(實用的)이며 군사적(軍事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근초고왕이 백제를 지배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고 특히 근초고왕의 행적은 20여 년이 나타나지를 않아서 일본 열도의 정벌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를 참고할 것). 더욱 이상한 일은 이 4세기 후반에 대한 일본 역사의 기록이 없어 흔히 ‘신비의 4세기’라고 한다. 일본의 사가들에게 이 시대의 역사는 말못할 사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그것은 반도부여(백제)의 정치사적 변화와 그대로 일치한다.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의 정치적 교환관계(交換關係)가 단순히 본국(本國) - 지방정권(地方政權)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와 같은 정도의 혈맹적인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연맹왕국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는 범부여 연합국가(USB : United States of Buyou)라는 것이다.


  두 나라는 국가원수의 교체에 있어서도 서로 관여하는 등 거의 한나라 수준의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정치적인 일체성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백제의 진사왕이다. 또한 백제 - 가야 - 일본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실제 기록들이 『일본서기』에는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긴메이(欽明 : 531~71) 천황 2년에 백제의 성명왕(523~554 : 백제 성왕)이 가야에서 온 여러 사람들에게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의문스러운 점은 백제의 무왕이나 성왕은 일본의 죠메이천황(舒明天皇 : 628-641) 및 긴메이천황(欽命天皇)과 동일인이라는 여러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小林惠子『二つの顔の大王』(文藝春秋 : 1991)].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연합국가 범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다. AD 4세기에서 AD 7세기 반도부여(백제)의 멸망 때까지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는 연맹국가 이상 또는 같은 나라 수준이 아니면 곤란할 정도의 생산요소(production factors)나 국가자원(national resources)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하나하라(埴原和郎)는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渡來人)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 지방의 대부분 사람들이 도래인(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다.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까지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東京大學人類學雜紙 1987年 英文版「古代日本 移住者 數 推定」). 당시 교통수단이나 인구의 수준을 감안해 보면 이는 국가적인 이동에 해당한다. 


  AD 5세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반도부여(백제)는 대장장이․토목공사전문가․양조업자․의복재단사 등의 전문직 사람들을 대거 보냈으며 403년에는 궁월군[弓月君 : 하다씨(秦氏) 씨족의 시조]이 무려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 아지사주(阿知使主 : 아야족의 시조)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왔으며 463년(유략쿠 7년)에 대규모의 기능공들이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등 반도부여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오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앞의 책을 참고할 것)


  뿐만 아니라 반도부여(백제)에서 열도부여(일본)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반도부여의 수준에 준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국가적 동일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즉 당시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인원이 일본으로 갔는데 이들은 백제에서 가졌던 지위에 따라 일정한 직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은 백제왕(百濟王)이란 호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일본 조정의 고위인사들이었다(『續日本記』) 귀족들의 경우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일본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략 60여명 정도의 백제 유민이 일본의 조정에 참여했으며 일본의 『고사기(古事記)』(712)나 『일본서기(日本書紀)』(681~620)의 편찬에도 깊이 개입한다.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범주에 둘 수 있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할 당시 반도부여(백제)를 방어하고 지키려는 일본의 의지가 하나의 나라가 아니면 곤란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일본은 마치 국운(國運)을 걸고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원정 해군을 지휘했으며 나카 왕자는 5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백제를 원조하게 했으며 풍왕자는 5천명이 넘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6명의 장군이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로 갔으며 당시 백제 부흥운동을 위해 파견된 백제의 좌평 복신(福信)에게는 화살 십만 척, 실 5백 근, 솜 1천 근, 피륙 1천단, 다룬 가죽 1천 장, 종자 벼 3천 석이 주어졌고 다시 피륙 3백단을 백제왕(풍)에 주었다(『日本書紀』「天智天皇」). 이러한 일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제․일본 연합군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패배하여 일본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三國史記』「百濟本紀」.).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서기』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日本書紀』「齊明天皇」).”라고 하고 있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 서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



 

            [그림 ④] 반도부여의 슬픈 유적 : 백마강과 낙화암 

    

  이상의 논의들을 토대로 본다면 일본은 바로 반도부여를 이은 부여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백제와 일본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부여(扶餘)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가 있다.

 

 

 


참고 『대쥬신을 찾아서』제1권

        12.일본 신들의 고향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18. 왜 한국인들의 이름 -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관련 사이트 : www. ebiz114.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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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국  가

 

---------------------

구석기 시대

--------

 

 

---------------------

신석기 시대

--------

 

2500

고조선(단군조선)
BC 2333 ~ BC238

 

 

2000

청동기 시대

 

1000

 

500

철기 시대

 

400

 

300

 

 

200

 

100

북부여 BC239-BC58

 

BC 50

신라
BC 57~935

 

---------

---------

--------

 

0

---------

고구려
BC 37~668
신라에 멸망

백제
BC 18~660
신라에 멸망

 

AD 50

가락(가야)
42~532
신라에 귀순

100

200

300

400

500

600

 

650

700

통 일  신 라
고려에 귀순

발해
698~926
거란에 멸망

800

850

900

 

 

태봉(후고구려) 890~918
고려에 멸망

후백제
892~935
고려에 멸망

950

 

1000

고려
918~1392
조선에 멸망

 

1100

1200

1300

1400

조선 1392 ~ 1910

 

1500

1600

1700

1800

1900

1910

일제 강점기 1910 ~ 1945

1945

1945

미군 군정 1945 ~ 1948

1948

대한민국 1948 ~ 현재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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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된 주몽. 사라진 북부여의 역사.

 

먼저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북부여를 개국한 북부여 제1대 단군이다. 그리고 그 둘째 아들이 고진이고 이 고진의 손자가 불리지이고 이 불리지가 하백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고주몽이다.      

 

그리고 제4대 단군은 고우루인데 이 고우루의 단군의 동생이 바로 해부루다. 고우루 단군 때 한무제가 난하 유역의 왕험성을 중심으로 한 위만 정권의 분열을 틈타 쳐들어 오는데, 이를 일거에 격파하고 동명국을 개창한 이가 바로 고두막한이다.      

 

이 고두막한은 이번 대하사극에 그 이름조차 빠져있다. 이 고두막한은 제5대 북부여 단군이 되는데 이 분의 손녀가 바로 소서노다. 그러므로 소서노는 제6대 고무서 단군의 외동 딸인 바, 고무서 단군은 주몽을 자신의 사위로 삼아 북부여를 넘겨준다.      

 

그리고 해부루란 제4대 고우루 단군의 동생으로 고두막한의 배려로 가섭원 땅으로 옮겨가 동부여를 개창하게 된다. 그리고 금와는 이 해부루의 아들이고, 이 금와의 아들이 바로 대소다.  

 

연타발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제2대 모수리 단군의 신하로 상장이 되어 위만의 침입을 차단한 인물이고, 한 사람은 거상으로서 고주몽의 신하가 되어 나중에 좌원에 봉해진 인물이다.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불리지와 야합을 한 까닭으로 아버지 하백에 의하여 별궁에 유폐되는데, 이 유화를 거둔 것이 바로 해부루이다. 그 후 유화는 불리지의 아들인 주몽을 출산하게 되는데, 이 주몽은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기 전에 이미 동부여에서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유리를 두게 된다. 이 유리는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제치고 나중 고구려 황제가 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는데 제5대 고두막한 집안의 매력이다. 동명제 고두막한은 원래 단군조선 47대 단군조선의 마지막 고열가 단군의 후손이다. 그리고 이 고열가 단군는 단군조선 43대 물리 단군의 고손자다. 그리고 환단고기에서는 단군조선 29대 마휴 단군 부터 43대 물리 단군까지는 자기 아들에게 대를 전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화충의 난을 평정하고 제위에 오른 제 44대 단군이 조선에서 대부여로 국호를 변경하였으므로, 제43대 단군은 단군조선 마지막 단군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상장군으로 한개의 난을 평정하고 제위에 오른 47대 고열가 단군은 고리국인 종실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나고, 제후들이 말을 잘 안들어먹자 오가에게 정치를 맏기고 제위를 버리고 은둔하므로서 대부여는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됨으로 고열가 단군은 대부여의 마지막 단군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삼한 일통의 사상에 의하여 제47대까지를 단군조선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고두막한이 한무제의 침입을 격퇴하고 동명국을 건국하여 이를 기반으로 북부여 제5대 황제가 되었는데 그 아들인 제6대 고무서 단군이 해모수의 후손인 고주몽을 사위로 삼아 제위를 넘김으로서 북부여는 제6대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됨으로 고무서 단군은 북부여 마지막 황제 및 동명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고주몽이 고구려로 국명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두막한 혈통은 단군조선 제2기라 볼수있는 제22대 색불루 단군으로 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28대와, 29대가 태자나 자로서 제위에 올랐다는 말이 없으므로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며, 환단고기에서는 정황상 27대와 28대 통치기간에 여러가지 천재지변 및 여러 우환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대하사극 주몽을 보면서 몇 가지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 해모수의 진손자 불리지의 부인인 하백의 딸 유화가 해모수의 부인이 된 점.

- 소서노는 제6대 고무서 단군의 딸인데, 소서노가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된 점.  

- 북부여와 동부여는 별개이며, 북부여는 황제국이고, 동부여는 북부여의 명을 받드는 제후이라는

   점.

- 그리고 이 때는 열국시대로서 우리 민족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나라와는 

   천진, 북경 근방에서 대치중인 상태로 아직은 북부여를 중심으로 형식상이라도 연합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 글 : 송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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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전 우리나라 지도

1700여년 전 당시 고대 한국 국가들의 영토확장, 타지정벌 및 진출로.

한글 지명.

영문 지명.

-부여가 완전히 고구려로 통합되기 전까지 부여는 오늘날의 러시아 땅 중남부에서
그 세력이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쓸만한 땅은 그 당시 한창 약탈경제에 의존하던
고구려에 의해 모두 빼앗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로 인해서 만주일대에서 존재하던 왕국 및 부족국가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지거나
고구려로 병합, 식민통치를 받았는지 모르나 고구려의 지배정책은 굉장히 포용적인 것으로
"현지인 등용"체제를 도입하여 피지배민들에게 환영받는 식민통치 제도를 실시하였다.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위해 타국을 침공하여 그들에게 항복을 요구할 경우 이러한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순응하는 한 고구려에 먹힌 국가유민들은 비록 피지배민(노예, 종, 하급 관리)
신분이지만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었고 고구려가 방위를 책임졌기에 고구려를 제외한
외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국가들의 말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고구려군의 창칼 아래 모두 무참히 쓰러져 죽어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라진 국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만주일대와 중국 서부, 몽골 일대를 장악한 고구려는 대륙에서 쓸만한
땅은 모두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고구려 주변의 모든 바다를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구려인들과 같은 민족이 세운 나라인 신라와 가야가 자리잡은 한반도
남부에 때로는 침공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무역하러 오기도 하는 왜인(일본인)들의 열도를
정벌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고구려군은 대규모 수군을 파견하고 함선 한척 한척마다 중장기병과 개마무사단, 보병
이외에 추가로 투석기와 궁수부대를 배치시켰는데, 이것은 왜열도에 상륙하기 전에 그들이
반격해올 것을 염두에 두고 바다에서 먼저 육지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문명이 미개했던 왜인들은 "수탉을 무찌르자"며 반수탉 결사대를 조직해 열심히
고구려군들의 침공에 대항하였지만 끝내 고구려가 노린 북부의 열도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왜인들은 왜 열도 중남부의 자치구로
이주하여 살았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이 침공해오기 전부터 왜열도의 중북부와 중부, 남부는 거의 다 백제의
지배하 아래 있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왜열도에 식민지를 개척한 국가는 백제였다.

백제의 경우, 왜인들에게 선진문화를 전파해주겠다는 구실로 국방을 해지할 것을 요구했다.
손쉽게 "문화 전파"를 명분으로 파견한 백제 수군이 손쉽게 왜열도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게하기
위한 계략이었는데 왜인들은 순진하여 백제에게 꼼짝없이 속아 이미 땅의 반을 빼앗겨
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일본의 대부분을 식민통치하게 된 백제는 상당히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펼쳤다.
백제인만이 고관직에 올라 한 지역의 태수나 영주가 되어 왜인들을 지배하기는 했지만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의 수많은 백제인들을 왜로 불러와 왜인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 과정에서 백제인들과 왜인들은 공통점을 늘려가며 지배민과 피지배민이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함께 어우러져 사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고 그러면서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의 왜인들의 군사력이 강해진 것도 백제군에 징병되어 훈련받고 배우게 되면서부터인데
일본의 사무라이, 칼잡이들은 백제의 싸울아비와 무사(백제말로 "부샤", 후에 일본인들이
자국어로 순화시켜 부시라고 한다)들로부터 백제인들의 뛰어난 검술과 검제조술을 전수받은 것이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백제가 왜인들에게 온건적이고 자율적인 평화정책을 허락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항하는 왜인들을 상대로 백제인들은 고구려인들보다 한 수 더 잔혹하고 무서운 군사력으로
베어나가며 살육했던 것이다. 왜열도 지배권을 놓고 싸우면서 초창기에 백제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흉폭하게 탄압하는지를 보고 고구려인들이 질려하며 백제를 오죽하면 "백잔"이라고 불렀겠는가.

이로 인해 일본 열도의 지배권을 독점하기 위해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싸움이 매우 잦아졌는데
이 틈을 노린 신라 또한 해상권 장악을 목표삼아 우산국, 독도, 그리고 왜열도의 중남부 반도 몇
곳을 찬탈했다.

이렇게 삼국이 대륙에만 영토확장을 하지않고 섬나라도 하나씩 점령하고 있을 즈음, 한반도
중남부에서 백제와 신라 양국의 간섭과 침략에 자주 시달리던 가야국은 자신들과 마찬가지 상황에 있는 "형제국"인 왜와 손잡고 그나마 아직 빼앗기지 않은 땅을 함께 지키기로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또다른 "가야연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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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2단 이쁜이미지테이블 만들기




장미가족 실습예제

<예제1> <table border=5 bordercolor=#9F9F9F width=476> <tr> <td><img src=http://tear.rofam.net//image/zzang/go/30.gif></td> </tr> <tr> <td align=center> <span style="font-size:9pt; letter-spacing:-2;"> *장미가족 공지사항* <br> <br><br><br> 1. 장미가족안에서 싸우지않기<br> 2. 장미가족안에서 화내지않기<br> 3. 장미가족안에서 질서지키기<br> 4. 장미가족안에서 사랑하기 <br> 5. 장미가족안에서 행복하기 <br> 6. 장미가족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기<br> 7. 장미가족 언제나 사랑하기 <br> </span> </td> </tr> </table> <예제2> <table border=5 bordercolor=#9F9F9F width=476> <tr> <td><img src=http://tear.rofam.net//image/zzang/go/30.gif></td> </tr> <tr> <td align=center bgcolor=black> <font color=white face=돋음 size=2> *장미가족 공지사항* <br> <br> 1. 장미가족안에서 싸우지않기<br> 2. 장미가족안에서 화내지않기<br> 3. 장미가족안에서 질서지키기<br> 4. 장미가족안에서 사랑하기 <br> 5. 장미가족안에서 행복하기 <br> 6. 장미가족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기<br> 7. 장미가족 언제나 사랑하기 <br> </font> </td> </tr> </table>



장미가족 실행결과

<예제1>

실행결과클릭



<예제2>

실행결과클릭





장미가족 보충설명


* 소스분석하기 <첫번째소스> <table border=5 bordercolor=#9F9F9F width=476> <tr> <td><img src=http://tear.rofam.net//image/zzang/go/30.gif></td> </tr> <tr> <td align=center> <span style="font-size:9pt; letter-spacing:-2;"> *장미가족 공지사항* <br> <br><br><br> 1. 장미가족안에서 싸우지않기<br> 2. 장미가족안에서 화내지않기<br> 3. 장미가족안에서 질서지키기<br> 4. 장미가족안에서 사랑하기 <br> 5. 장미가족안에서 행복하기 <br> 6. 장미가족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기<br> 7. 장미가족 언제나 사랑하기 <br> </span> </td> </tr> </table> *********************************************************************** 설명 : <table border=5 bordercolor=#9F9F9F width=476> table border은 테이블의 선(테두리) 굵기를 지정합니다. 테이블굵기를 5로 지정하였습니다. bordercolor는 테이블의 색을 지정합니다. 저는 이미지와 비슷하게 회색톤으로 했습니다. 색상코드는 여러분들이 지정하시면됩니다. width=476은 테이블의 가로길이를 지정합니다. 이미지의 가로길이와 맞추어서 지정하시면됩니다. <tr> : 테이블 줄을 의미합니다. <td><img src=http://tear.rofam.net//image/zzang/go/30.gif></td> td는 칸부분을 말합니다. 첫번째(위의)칸에 이미지를 삽입하시면됩니다. </tr> : 테이블줄을 닫습니다. <tr> : 두번째 테이블의 줄을 뜻합니다. <td align=center> 두번째칸의 글의 정렬상태입니다. center을 지정함으로써 글자를 중앙정렬하였습니다. 만약 left로 설정하시면 글이 왼쪽에 붙게 됩니다. right로 지정하시면 글이 오른쪽에 붙게 됩니다. <span style="font-size:9pt; letter-spacing:-2;"> 글을 꾸미는 속성입니다 이부분은 나중에 CSS강좌에서 좀더 깊숙이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 소스분석하기 두번째소스 <table border=5 bordercolor=#9F9F9F width=476> <tr> <td><img src=http://tear.rofam.net//image/zzang/go/30.gif></td> </tr> <tr> <td align=center bgcolor=black> <font color=white face=돋음 size=2> *장미가족 공지사항* <br> <br> 1. 장미가족안에서 싸우지않기<br> 2. 장미가족안에서 화내지않기<br> 3. 장미가족안에서 질서지키기<br> 4. 장미가족안에서 사랑하기 <br> 5. 장미가족안에서 행복하기 <br> 6. 장미가족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기<br> 7. 장미가족 언제나 사랑하기 <br> </font> </td> </tr> </table> *********************************************************************** 이 부분은 위의 소스와 똑같지만 한가지 달라진점이 있다면 두번째칸의 바탕을 검정색으로 지정했다는 것입니다. <td align=center bgcolor=black> 두번째칸의 바탕을 검정색으로 지정했습니다. bgcolor의 속성값은 여러분들이 지정하시면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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