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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역사

북부여의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며 어미가 유화부인이라고

하며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따져볼때

 해모수의 아들이 해루부이고 그의 양아들이 금와이므로

주몽과 금와는 삼촌사이이며 대소왕자는 주몽에게 할아버지정도로 불러야 할정도로

오류가 생김

그렇다면 환단고기를 끼워놓으면



위와 같이 나오는데 해모수가 왕을 칭하는 칭호가 ?瑛? 가능성을 생각할때

이해가 되죠.

모든기록을 근거로

주몽은 정치적인 상황에서 쫓겨나게 되며

오이,마리,협보등을 데리고 소서노의 세력과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게 되며

기록으로 북부여가 없는것을 볼때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북부여를 멸망시키고 동부여의 땅을 빼앗으며 세력을 떨쳤다고 볼수 있겠는데

드라마에서는

같은 시대에 해모수가 나오며 일개 장수로 나옵니다.

금와왕과 유화부인과의 관계가 이상하게 나옵니다.

주몽이 도망친것은 좋은데 건국은 무시하고 해모수를 만나지 않나

도로 돌아오질 않나 기록과 년대가 뒤죽박죽인데

 

만약 드라마를 고증으로 한다면

주몽은 정치적 박해로 인해 친위세력과 오이,마리,협보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그곳의 소서노세력과 연합하여

그곳의 통치자 연타발의 힘을 얻어 세력을 장악하고

주몽은 이미 부인과 자식을 둔몸이며 소서노역시 우태의

아들까지 있는 상태였지만 주몽에게 희망을 걸고 정치적 파트너로 삼는다.

주몽은 나중에 고구려를 세우고 북부여,동부여공략에 나서서 북부여를 멸망시킨다.

 

정도가 되겠는데

 

드라마가 고증과 정확을 따지면 역사스페셜을 드라마로 만들거나 아예 북한에서

고구려 드라마를 찍던지 해야지 많은것을 바라기에는 무리인듯합니다.

 

<발해국왕세략사>(태조 진국왕의 성은 대이며 휘는 중상이다.)

.....!

진국의 대중상과 발해국의 대조영에 대해 혼동하는 분은

<류취국사> (.....아메노마무네 도요호오찐 천황 2년에 대조영이 처음으로 발해국을 세웠다)고 하였고

 

발해는 역시 당이 정한것이 아니라 당과의 자존심 싸움의 결과이며

대조영이 자신의 태자에게 <께루국왕>으로 책봉한것을 볼때

고구려 태왕처럼 여러소왕을 거느린 황제국입니다.

 

 

원래하고자 한 이야기보다 많으며 9000년우리역사이야기 게시판에 적으려고 했는데

보려는 사람도 없을것 같고 해서 여기에 적었으니 명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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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주몽>이 5월부터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재미있는 드라마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상황설정과 지나친 극적 구성으로 실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에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대사의 고리를 고스란히 복원시켜주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드라마 <주몽> 시대의 역사를 알아보고 한민족 상고사의 국통맥을 간추려 소개한다.
 
 
 
어린시절 주몽은 겁쟁이?
 왜곡의 한 예로,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의 인물됨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주몽은 ‘기골(氣骨)이 뛰어나 범인과 달랐으며, 불과 일곱 살이 되어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나온다. 그래서 ‘(동)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에(善射者謂朱蒙) 그를 또한 주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주몽은 나이 스물이 되도록 활은 고사하고 칼 한번 들어보지 못한 겁쟁이로 나온다. 극적 전개를 위한 각색이라고 해도, 고구려 창업군주의 인물됨을 왜곡하는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드라마 <주몽>이 한민족의 상고사 특히 부여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천제지자(天帝之子) 고주몽     
 
근래 TV 사극은 옛사람들의 정신의 맥과 한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측면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야비한 다툼만을 부각시켜서 드러내는 경향이 짙다. <주몽> 역시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로,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정치사, 전쟁사로 몰아가는 문제점이 있다. 고대 인물들이 현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주몽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주몽이 영특하고 대범하고 영웅적인 기개가 있으니, (동)부여국 왕자들이 주몽한테 왕위를 뺏길까봐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주몽이 도망을 가다가 엄리대수(淹利大水), 즉 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 되는데, 뒤에서는 (동)부여 군사가 주몽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다.
 
 그 때 주몽이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나는 천제 즉, 상제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 이런 뜻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상제 문화, 천자문화가 생생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태왕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도 우리 고주몽 태조께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요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쓰여 있다. 그 말은, 당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대행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夫餘)사
 
이제 구체적인 역사 내용을 논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여사의 왜곡으로 인해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인 불리지(일명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과 해모수가 부부인연을 맺은 것으로 설정하여, 유화부인이 시증조할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런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
드라마에서는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원시)부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 수많은 부여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시청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몽이 태어난 나라는 ‘동부여’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 단군의 고손자로서 황손(皇孫)이다.(『삼국유사』도 분명히 해모수가 북부여의 건국자임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했던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과 국내사가들의 중국사 베끼기 |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잘 모르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에 기인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다 언급하기 힘들지만, 중국은 한(漢) 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이후로 동방의 천자국(天子國), 스승의 나라, 조선(朝鮮, 고조선)의 역사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은 세상에서 아는 것과 달리 하나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국 아래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일종의 연방체제로 이루어진 대제국이었다. 조선이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단지 제후국의 이름만 거론하면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후세의 김부식과 같은 우리의 역사가들은 중국인들이 써준 역사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탓에 우리의 역사, (고)조선사는 실체가 없는 신화로만 남게 된 것이다.
 
 (고)조선사를 역사 속에서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여사 또한 지우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 계승은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거쳐서 열국시대와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시대(대진국·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게 되는데, 북부여를 역사 속에서 지우면 뒤에 생겨난 국가들은 (고)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노렸던 것이다.
 
 
 
읽어버린 부여사
 그럼 구체적으로 부여의 정체를 풀어보자. 이것이야말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동양 한민족사의 실체에 얽힌 중대한 비밀코드를 풀어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역사 |
부여의 원뿌리는 (고)조선(朝鮮)이다. (고)조선은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나라를 크게 진한(辰韓, 후기엔 진조선) 번한(番韓, 후기엔 번조선) 마한(馬韓, 후기엔 막조선) 셋으로 나눠,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번한 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어 일종의 연방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삼한 안에도 더 작은 제후국들이 존재했다.
 
 
대부여의 등장 |
44대 단군은 구물(丘勿)단군이다. 그는 본래 43대 물리단군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43대 단군 때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 사냥꾼들을 모아 반역을 저질렀다. 그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물리단군이 피난 중에 죽자, 이에 맞서 반란자들을 제압한 이가 바로 상장군 구물이었다. 이에 5가(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 5인으로 구성된 조정의 주요 대신(大臣)들) 제신들은 그를 44대 단군으로 추대하게 된다.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개원(開原), 단군 44대~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고)조선의 종통은 보전하고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요컨대 (고)조선의 국호가 부여(대부여)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고)조선의 국통은 다름 아닌 부여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제식민사학을 답습한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과 부여가 어떤 관계이며, 또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어떻게 국통맥이 이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북부여의 등장 |
(고)조선 말기인 대부여로 오면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군권이 독립되고, 진조선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군웅들이 할거하며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는 50여년에 걸친 치세에도 결국 이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고, 5가 대신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은거하게 된다.(BCE 238) 이로써 2,096년간의 (고)조선은 막을 내리고, 5가(五加)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고)조선의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세력을 키우면서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5가 제신들의 추대로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다시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게 된다(BCE 232). 이렇게 대부여의 국통은 북부여로 이어진 것이다.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해모수도 ‘단군’으로 호칭했으므로, 해모수 단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에는, 북부여가 ‘대부여’ 곧 단군 (고)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
그러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3대손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옛날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 하여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의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삼신문화가 전수된 정신사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직계조상과 후손으로서 혈통줄을 타고 계승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는 엄밀히 말해서 동부여이다. 그런데 해부루가 다스렸던 동부여는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의 전한(前漢)과 국경을 맞대고있지도 않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도 없었다. 동부여는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여에 의해 막혀 한나라와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드라마가 상정하는 그 자리에는 사실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 동명성왕 고두막한
 
또 드라마에서 볼 때 전한(前漢)이 매우 강성하여 부여 국내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은 북부여의 국통을 잇게 되는데, BCE 58년 고무서 단군이 죽자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북부여의 6대 단군인 고무서(高無胥)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소서노는 그의 아들 온조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니까 소서노는 드라마에서처럼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본문에서조차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 후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단지 일설로만 연타발의 딸일 가능성을 주를 달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나라의 국통맥을 치졸하게 끊어놓는 것이다. 연타발은 고구려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BCE 200년경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킨 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의 세력에 쫓겨 (고)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의 변방으로 피난을 와 있다가 BCE 194년 번조선 왕조를 강탈하게 된다.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 무제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인해 번조선 위만정권도 막을 내리게 된다.(BCE 108년)
 
 한 무제는 계속해서 번조선 일대와 북부여의 서쪽변방으로 침략을 하는데, 이 때 서압록(요하)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가는 곳마다 격퇴하여 민심을 크게 얻게 된다. 고두막한은 또한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민심과 혈통을 바탕으로 북부여 4대 고우루 단군을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개칭하게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주몽이 아니다. 또한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도 아니다.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인 것이다. 그가 바로 북부여 5대 단군이며 고주몽의 장인이 된 6대 고무서 단군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물론 주몽이 ‘동명부여’(졸본으로 도읍을 옮겼기에 졸본부여라고도 함)를 계승하였으므로,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참고로,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를 이어 그의 동생 해부루가 5대 단군으로 먼저 즉위하였으나, 고두막한에 쫓겨 동쪽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나라를 옮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부여의 시작이다.)
 
 고두막한의 태양 같은 의기와 충의에 힘입어 사실상 한나라는 조선의 고토에서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가 번한의 영토 부근에 한사군(낙랑, 임둔, 현도, 진번)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나 고두막한을 필두로 한 민중의 뜨거운 저항으로 조기에 무너지고 만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제 이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혹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의 맥은 정신사에서…
 
이상의 내용은 주로 한민족의 정통도가사서를 묶어 편집한 『환단고기』 내의 「단군세기」,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런 사서들은 한양조선 시대조차 중국에 사대하는 풍토로 인해 금서로 묶여 있었다. 흔히 강단 사학자들이 기존의 역사 서술구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역사 서술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참역사는 정신사를 알아야 한다. 왜 고주몽 성제는 최초의 연호(年號)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던가? 다물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회복하다’, ‘되물리다’는 뜻을 가진 한민족의 고어(古語)이다. 고주몽 성제는 (고)조선의 역사적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혈통적 정신적인 연계성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역사 기술 풍토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참 역사는 고조선이 나라를 다스렸던 근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한민족 역사는 단순히 청동동검과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유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이 스테인리스 그릇이 아닌 토기에 음식을 해먹었더라도 오히려 오늘날 인간보다 훨씬 더 수승(殊勝)한 인간적 덕성으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사(先史)시대라 하여 반 짐승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도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 <주몽>! 무척 재밌다. 하지만 그 내용이 역사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낸 것은 아니다. <주몽>을 보되, 우리 민족의 참 역사를 재발견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더욱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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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늦 가을 속리산 산행(06/11/5/일)
글쓴이 : 타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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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 가을 속리산 산행 06. 11. 5(일) 늦은 가을날 촉촉이 젖은 속리산 산행을 하다 코스는 장각폭포-천황봉-비로봉-선선대-문장대-화북매표소 산행일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가을비가 온다고 하여 걱정했으나 새벽 무렵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한바탕 몰아쳤다 09:30경 산행들머리인 경북 상주 화북면 장각폭포에 도착한다 매표소를 지나 등산로에 접어들자 길 위로 낙엽이 수북하다 길 위로 수북히 쌓인 낙엽 위를 걸어가니 괜히 가슴이 설랜다 새벽에 내린 비 때문인지 나무와 낙엽들은 촉촉이 젖어 있다 등산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 웅덩이에도 떨어진 낙엽이 수북하다 계곡마다에는 떨어진 낙엽들로 가득하여 물이 보이질 않는다 계곡과 등산로 사이에 때 늦은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어 있다 계곡길 등산로를 벗어나 오르막이 시작되자 숨이 가파온다 늦가을이라서인지 신갈나무며 참나무는 잎이 떨어져 앙상하다 가끔 햇살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때마다 온기가 느껴진다 오늘 비가 온다고 해서인지 산행객들이 적어 호젓해서 좋다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땀이 이마만 적실 뿐 흐르지는 않는다 능선이 가까워지자 오른쪽으로 암봉들이 정연히 줄지어 서 있다 정연히 서 있는 암봉들은 입석대, 비로봉, 신선대, 문장대이다 천황봉을 향한 등산로는 키를 넘긴 산죽숲 속으로 이어져 있다 천황봉에 도착하자 갈령에서 출발한 백두대간 산행객들과 만난다 피악재에서 속리산 능선을 지나 밤티재까지는 백두대간 20구간이다 천황봉에서 정상주를 마신 후 표지석 주변에서 사진촬영을 한다 천황봉을 내려와 오르자 좌우능선에 있는 바위들의 형상이 기이하다 바위들은 거북모양으로 능선위로 기어 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암릉구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니 신선대 매점에 도착한다 햇빛이 내리쬐는 매점안과 밖에는 먼저 온 많은 산행객들로 붐빈다 신선대 매점에서 당귀주를 구입하여 점심과 겯들이니 너무 좋다 점심을 마치고 신선대를 출발하여 잠시 지나니 문장대에 도착한다 문장대를 오르는 사다리에서부터 정상까지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문장대를 출발하여 화북매표소로 하산한다 하산로 역시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마음이 넉넉해 보인다 오송폭포 아래 시원한 폭포수에 젖은 땀을 닦아내니 시원하다 (2006/11/5/일/타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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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가는 어느 가을날(일요일)영남 알프스를 가다
      2006. 10. 18~19. 무박으로 영남알프스 가을산행에 나섰다
      10월18(토) 밤 10시경 서울을 출발한지 6시간만에 배내고개 도착
      새벽 4시경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30분 후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코스는 배내고개-배내봉-간월산-신불산-영취산-통도사까지
      새벽의 어둠을 가르며 좁은 등산로를 따라 렌턴불이 이어진다
      주변이 어두워 후래쉬 불빛에 하얗게 드러나는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30여분 오르자 배내고개에 다다르자 배내봉 너머로는 불야성이다
      산 너머 낮은 지대에 자리한 울산 상북면 마을들의 불빛들이 환하다
      배내고개부터 등산로는 관목들 사이로 나 있으나 앞이 보이질 않는다
      어둠 속에서 앞사람만 따르다 보니 다른 산악회원들이 아닌가
      좁은 등산로가 잠시 넓어지자 천천히 가는 산행객을 앞질러 간다
      간월산으로 오르는 안부에 도착할 무렵 겨우 주변이 보일 뿐이다
      홀로 급경사를 오르다 보니 어둠속으로 간월산 정상이 나타난다
      어두운 정상에는 먼저 온 산행객들이 좁은 봉우리에서 웅성거린다
      어두운 간월산 정상푯말을 촬영하려 하였으나 후래쉬 작동이 더디다
      간월산 정상아래 마을을 불빛을 조망하며 간월재를 향해 내려선다
      간월재로 향하는 능선은 어둠속으로 작은 억새들 밖에 보이질 않는다
      동쪽으로는 멀리 어둠속으로 불빛들 사이로 산 능선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구릉에는 어둠속 갈대숯 사이로 얼기설기한 한무더기의 돌탑이 서 있다
      구릉부터는 작은 억새숲 사이로 침목계단이 정연하게 설치되어 있다
      동쪽하늘이 하얗게 밝아오기 시작하자 일출을 촬영하려는 인파로 북적인다
      동쪽의 부드러운 산 능선 너머에서 해가 떠오르는지 밝아오기 시작한다
      안개가 뿌열게 깔린 날씨였으나 아침해는 안개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여기 저기서 인파들의 탄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아침 해살은 간월재에서 간월산 정상까지 펼쳐진 억새를 향해 비춘다
      작은 억새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비치는 햇살에 은빛 날개 짓을 한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신불산으로 오르는 급경사 계단길에 접어든다
      급경사 나무계단 따라 오르면서 내려다 본 간월재는 무척 아름답다
      신불산 오르는 주변에는 도토리나무 같은 작은 관목들이 자라고 있다
      정상 못미쳐 봉우리에 도착하자 끝없이 이어지는 억새평원이 시원스럽다
      신불정상에 도착하자 신불재 너머로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름답다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영취산까지 온통 억새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불산에서 영취산에 이르는 억새 숲은 그 유명한 신불평원이 아닌가
      끝없이 펼쳐진 억새평원을 바라보면 시야가 탁 트이고 시원스럽다
      신불산 정상을 지나면서부터는 산행객들이 너무 적어 적막감마져 든다
      혼자서 쉬엄쉬엄 신불평원의 억새숲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보기도 한다
      불어오는 바람에 억새들은 햇살과 부딛쳐 반짝이는 것이 눈이 부시다
      영취산에 도착하여 신불평원을 뒤돌아 보니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영취산부터는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단풍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다
      노란 단풍이 물든 크고 작은 암봉을 넘나들다 보니 백운암 갈림길이다
      노란 단풍으로 물든 능선 아래로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룬다
      암벽사이로 뿌리를 내린채 자리한 작은 나뭇잎도 노랗게 물들어 있다
      백운암 갈림길에서 백운암까지는 단풍 숲사이로 난 길이 가파르다
      백운암에 이르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져 사람냄새가 나는 것 같다
      백운암을 지나자 도로가 넓어지더니 포장된 도로로 끝없이 이어진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지루해 지름길 소로를 따라 간다
      소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넓은 계곡을 끼고 극락암이 나온다
      극락암 주변은 산세가 수려하고 암자라고 하기에는 웅장해 보인다
      극락암에서 나와 삼거리에 도착하니 산악회 조총무님이 기다리신다
      이어 하산하는 일행들과 함께 노점에서 막걸리를 마시니 얼얼하다
      노점 노파가 일러준대로 도로 너머로 가니 맑은 계곡물이 시원하다
      맑은 계곡물에 땀을 닦아내며 영남알프스 산행을 마감한다.
                  (2006/10/15/일/타잔>
      
출처 : 영남알프스 억새산행
글쓴이 : 타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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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가는 어느 가을날(일요일)영남 알프스를 가다
      2006. 10. 18~19. 무박으로 영남알프스 가을산행에 나섰다
      10월18(토) 밤 10시경 서울을 출발한지 6시간만에 배내고개 도착
      새벽 4시경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30분 후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코스는 배내고개-배내봉-간월산-신불산-영취산-통도사까지
      새벽의 어둠을 가르며 좁은 등산로를 따라 렌턴불이 이어진다
      주변이 어두워 후래쉬 불빛에 하얗게 드러나는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30여분 오르자 배내고개에 다다르자 배내봉 너머로는 불야성이다
      산 너머 낮은 지대에 자리한 울산 상북면 마을들의 불빛들이 환하다
      배내고개부터 등산로는 관목들 사이로 나 있으나 앞이 보이질 않는다
      어둠 속에서 앞사람만 따르다 보니 다른 산악회원들이 아닌가
      좁은 등산로가 잠시 넓어지자 천천히 가는 산행객을 앞질러 간다
      간월산으로 오르는 안부에 도착할 무렵 겨우 주변이 보일 뿐이다
      홀로 급경사를 오르다 보니 어둠속으로 간월산 정상이 나타난다
      어두운 정상에는 먼저 온 산행객들이 좁은 봉우리에서 웅성거린다
      어두운 간월산 정상푯말을 촬영하려 하였으나 후래쉬 작동이 더디다
      간월산 정상아래 마을을 불빛을 조망하며 간월재를 향해 내려선다
      간월재로 향하는 능선은 어둠속으로 작은 억새들 밖에 보이질 않는다
      동쪽으로는 멀리 어둠속으로 불빛들 사이로 산 능선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구릉에는 어둠속 갈대숯 사이로 얼기설기한 한무더기의 돌탑이 서 있다
      구릉부터는 작은 억새숲 사이로 침목계단이 정연하게 설치되어 있다
      동쪽하늘이 하얗게 밝아오기 시작하자 일출을 촬영하려는 인파로 북적인다
      동쪽의 부드러운 산 능선 너머에서 해가 떠오르는지 밝아오기 시작한다
      안개가 뿌열게 깔린 날씨였으나 아침해는 안개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여기 저기서 인파들의 탄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아침 해살은 간월재에서 간월산 정상까지 펼쳐진 억새를 향해 비춘다
      작은 억새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비치는 햇살에 은빛 날개 짓을 한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신불산으로 오르는 급경사 계단길에 접어든다
      급경사 나무계단 따라 오르면서 내려다 본 간월재는 무척 아름답다
      신불산 오르는 주변에는 도토리나무 같은 작은 관목들이 자라고 있다
      정상 못미쳐 봉우리에 도착하자 끝없이 이어지는 억새평원이 시원스럽다
      신불정상에 도착하자 신불재 너머로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름답다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영취산까지 온통 억새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불산에서 영취산에 이르는 억새 숲은 그 유명한 신불평원이 아닌가
      끝없이 펼쳐진 억새평원을 바라보면 시야가 탁 트이고 시원스럽다
      신불산 정상을 지나면서부터는 산행객들이 너무 적어 적막감마져 든다
      혼자서 쉬엄쉬엄 신불평원의 억새숲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보기도 한다
      불어오는 바람에 억새들은 햇살과 부딛쳐 반짝이는 것이 눈이 부시다
      영취산에 도착하여 신불평원을 뒤돌아 보니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영취산부터는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단풍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다
      노란 단풍이 물든 크고 작은 암봉을 넘나들다 보니 백운암 갈림길이다
      노란 단풍으로 물든 능선 아래로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룬다
      암벽사이로 뿌리를 내린채 자리한 작은 나뭇잎도 노랗게 물들어 있다
      백운암 갈림길에서 백운암까지는 단풍 숲사이로 난 길이 가파르다
      백운암에 이르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져 사람냄새가 나는 것 같다
      백운암을 지나자 도로가 넓어지더니 포장된 도로로 끝없이 이어진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지루해 지름길 소로를 따라 간다
      소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넓은 계곡을 끼고 극락암이 나온다
      극락암 주변은 산세가 수려하고 암자라고 하기에는 웅장해 보인다
      극락암에서 나와 삼거리에 도착하니 산악회 조총무님이 기다리신다
      이어 하산하는 일행들과 함께 노점에서 막걸리를 마시니 얼얼하다
      노점 노파가 일러준대로 도로 너머로 가니 맑은 계곡물이 시원하다
      맑은 계곡물에 땀을 닦아내며 영남알프스 산행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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