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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북정맥 4구간 소나기속의 한여름 산행 동서울 터미널에서 와수리행 07:30분 버스로 08:40분 일동에 도착 일동에서 택시로 연곡4리 군부대 앞에서 하차하자 비가 내린다 하늘을 보니 계속 내릴 비는 아닌 것 같은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일단 배낭카바를 덮어 쓰고 비옷을 머리에 쓴 채 산행을 시작한다 불땅계곡을 지나 몇 채의 민가와 전원주택이 있는 마을에 도착한다 텃 밭에는 고추가 풍년하고 길 가에 메어둔 개는 무섭게 짖어댄다 마을을 지나자 도성고개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숲속으로 나 있다 숲 속길로 접어들자 나무와 풀들은 비가 흠뻑 젖어 뚝뚝 떨어진다 나무는 무성하여 하늘을 가리고 풀들은 무성하여 키를 넘긴다 젖은 나무와 풀들을 헤치며 오르다 보니 바지는 금방 젖어 버린다 작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한참을 오른다 계곡으로는 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것이 무척 평화롭다 계곡 길이 끝나고 본격적인 급경사 등산로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급경사 등산로는 흙 길이라서인지 내리는 빗물로 무척 미끄럽다 가픈 숨을 몰아쉬며 도영씨의 뒤를 따라 오르는데 무척 힘이 든다 미끄러운 급경사 길을 피하며 오르다 보니 도성고개에 도착한다 도성고개부터는 20여미터 폭의 잡초 밭 사이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등산로 주변에는 갈대, 억새가 사람의 키보다 크게 자라 빼곡하고 사이사이로는 하얗고 노란색깔의 각종 여름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억새 옆에 자란 쑥들도 키재기를 하며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다 사람 키를 훨씬 넘긴 풀 섶을 헤치며 오르다 보니 속도가 더디다 잡초들이 워낙 무성하여 싸리나무며 갈대를 헤쳐야 길이 보인다 갈대의 끝에는 길쭉히 꽃들이 피기 시작하고 줄기는 무척 날카롭다 반팔차림으로 날카로운 갈대를 헤치며 가다보니 팔이 상처투성이다 첫 째 봉우리에 올랐을 때는 입던 옷과 양말이 흠뻑 젖어 있다 비로 흠뻑 젖은 들풀들을 헤치며 오르다 보니 흠뻑 젖은 것이다 옷과 양말을 벗어 물기를 쥐어짜고 입으니 보송보송한 느낌이다 내리막으로 들어서자 등산로 주변의 풀들에 물기가 말라 있다 능선을 따라 가다보니 표지석이 서 있는 강씨봉 정상이 나온다 강씨봉과 한나무봉을 지나 오뚜기령을 내려다 보니 인적이 보인다 깊은 산 속 길을 둘이서 걷다보니 외롭고 적적했는데 무척 반갑다 한 달음에 오뚜기령에 도착하여 임도로 올라온 산행객과 만난다 산행객 네명은 노채고개에 차를 두고 이곳으로 올라 왔다고 한다 오뚜기령 표지석 아래에서 신발끈을 고쳐메고 청계산으로 향한다 앞만 보고 걷다보니 등산로를 못보고 지나쳐 헬기장에 이른다 다시 내려와서야 좌측으로 난 등산로를 찾아 오르기 시작한다 이구간은 풀 섶이 작고 물기가 말라있어 오르는데 휠씬 부드럽다 귀목봉을 좌로하고 30여분을 오르자 귀목봉 갈림길 쉼터에 이른다 귀목봉 갈림길 쉼터에는 두개의 의자를 만들어 놓아 요긴했다 먼조 와 점심을 먹던 또 다른 산행객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우리도 쉼터 의자에 자리를 하고 점심을 하며 막걸리로 목을 축인다 점심을 먹으려 하는데 오뚜기령에서 만난 산행객들이 도착한다 먼저 온 산행객들은 먼저 자리를 뜨고 뒤에 온 산행객들도 출발한다 우리는 점심을 마치고 나서야 뒤를 따라 청계산을 향해 출발한다 귀목봉 갈림길부터는 참나무 숲 사이로 난 흙 길 등산로가 시작된다 참나무 아래로 이어진 등산로는 흙 길과 암릉길로 이어져 흥미롭다 암릉 길마다에는 대부분 자일이 설치되어 있어 위험하지는 않아 좋다 숨을 몰아쉬며 암릉길을 오르다보니 바위 투성이인 청계산 정상이다 청계산 정상에서 오던 길을 뒤돌아보니 귀목봉과 명지산이 조망되고 앞으로는 길마재를 지나 길마봉과이 보이고 너머로 운악산이 보인다 청계산에서 길마재 방향 내리막길에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암릉길은 자일이 설치되어 있고, 급경사는 철사다리가 있어 좋다 길마봉을 바라보며 내려가는 등산로는 급경사 길로 무척 힘이 든다 길마재 빈 터에는 온갖 여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자태를 뽐낸다 길마봉으로 가는 길은 잠시 풀 섶길을 오르는가 싶더니 암릉길이다 작은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자리한 고만 고만한 암릉길이 흥미롭다 길마봉 정상에 도착하니 가야산악회에서 세운 표지석이 서 있다 길마봉에서 한구비를 지나니 참나무와 소나무 숲 길로 이어진다 등산로 우측으로는 청계저수지가 보이고 너머로는 일동이 보인다 저수지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시골 마을은 무척 한가로워 보인다 노채고개까지는 군부대에서 설치해 놓은 교통호를 따라 이어진다 흙 길 등산로를 따라 노채고개가 가까워지자 요란한 굉음이 울린다 노채고개에 이르니 능선 상층부가 100여미터 이상이 절개되어 있다 고개를 관통하는 도로공사가 한창이라 암반을 깨는 굉음이 요란하다 16:30경 노채고개에 도착하니 도로공사로 깍인 고개가 흉물스럽다 절개 폭과 높이를 볼때 터널공사를 해도 충분할텐데 아쉽기만 하다 일동방향으로 내려오다 계곡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니 정말 시원하다 남은 막걸리 한병을 하산주로 하여 나눠 마시니 정말 꿀 맛과 같다 (2006/8/26/토/소나기, 흐림)....타잔, 도영....

출처 : 강서산악회
글쓴이 : 타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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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중순의 도봉산 종주산행 8월 중순이면 더위가 한풀 꺽일 법도 한데 밤이면 열대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힘이 든다 쉬는 낮에도 무더위 때문에 집에 있기도 힘들다 모든 것 잊고 모처럼 무더위 속에 홀로산행을 한다 오늘 산행은 도봉산을 남북으로 종주하는 코스로 그린파크-도봉주능선-정상-포대능선-사패능선-사패산 날씨는 아침부터 푹푹 찌는 듯한 날씨로 시작된다 토요일 아침이라서인지 전철 안은 무척 한산하다 우이동 그린파크앞에서 09:40경 산행을 시작한다 등산로 입구에는 등산객이 나 혼자 뿐이라서 한산하다 포장도로를 지나 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햇빛이 가려진다 혼자서 꼬불꼬불한 좁은 등산로를 따라 서서히 오른다 매표소를 지나 배낭을 고쳐메고 마사토 길을 따라 오른다 지난번 비로 인해 등산로의 흙이 꽤 유실된 듯 보인다 가끔 하산하는 산행객과 마주칠 때면 반가움 마져 든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완만한 우이 남능선으로 접어든다 우거진 소나무 숲길을 지나니 원통사 갈림길이다 직진 방향은 위험구간이니 원통사로 우회하라고 한다 나는 직진하여 오르니 급경사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모퉁이를 돌아서 잠시 지나니 바위길이 앞을 막는다 커다란 바위위로 기어올라 보니 진행 길이 없다 바위에서 내려와 우회로를 따라 바위를 돌아선다 능선의 암릉으로는 등산로가 보이질 않고 우로 우회한다 왼쪽 8부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나무숲으로 어둡다 음침한 비탈 우회로를 돌아서니 앞으로 멀리 오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주봉, 신선대, 자운봉, 만장봉이 보인다 정상까지는 도봉 주능선이 뱀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내리쬐는 햇빛은 따가운데 바람은 너무도 시원하다 도봉 주능선 정상 계단을 오르는데 꽤 힘이 든다 정상에 서 있는 노송아래에 앉아 있으니 바람이 시원하다 도봉동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완연한 가을바람이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젖은 땀을 금방 말려 버린다 사패능선 암릉길도 오늘은 산행객이 적어 한산해서 좋다 사패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암릉길은 참으로 장관이다 시계가 너무 좋아 멀리 있는 봉우리도 가까이 보인다 능선을 따라 쉬엄 쉬엄 사패산을 향하니 기분도 짱이다 산불감시초소에서 이어지는 시패능선 길은 좁은 흙 길이다 한참을 내려가니 망월사역에서 오르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사패능선 흙길을 따라 사패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걷기가 좋다 사패산 정상 마당바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무척 따가웁다 사패산에서 되돌아 내려오다 넓은 바위에 자리를 잡는다 넓은 바위는 소나무 숲들이 그늘을 만들어 무척 시원하다 아래에서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신선이 따로 없다 소나무 그늘과 시원한 바람에 감사하며 점심을 해결한다 식사후 능선을 따라오다 회룡매표소 길로 하산로를 잡는다 하산로는 급경사로 시작되어 내리막이 무척 가파르다 10여분 내려오자 완만한 길로 바뀌면서 고온다습해진다 정상의 시원한 바람은 없어지고 가끔 불어오는 습하다 등산로를 따라 이어지는 계곡에는 물이 흐르질 않는다 물이 흘러야 할 계곡에는 돌들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등산로를 따라 계곡을 이리저리 건너는 다리는 운치를 더한다 1시간 여를 하산하니 회룡골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감한다. (2006/08/19/토/날씨 맑음)...타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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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테크’로 내 몸 깨운다


      [조선일보 여성조선기자]

      휴가도 끝나고, 학교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방학도 끝났다. 이맘때면 엄마와 아이들은 아침잠 줄이는 습관을 들이느라 옥신각신이다. 여름내 열대야와 선풍기, 에어컨 바람에 시달린 어른들도 숙면을 열망하기는 마찬가지. 해는 점점 짧아지고, 가을에 맞춰 생체시계를 맞추려면 올바른 잠테크를 알아야 한다.

      ◆규칙적인 생활로 몸 속 ‘생체시계’를 다스려야

      ‘생체시계’란 인간의 심장박동, 호르몬 분비, 행동, 노화 등 주기적인 생체리듬을 주관하는 몸 속 시계. 일정한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든지, 어둠 속에 갇혀 있더라도 밤과 낮의 시간에 따라 일정하게 체온의 변화나 수면의 욕구 등이 생기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매일 출근시간, 점심시간, 퇴근시간과 같은 사회적 일상에 생체시계를 맞추고 산다. 그러다 방학이나 휴가를 맞게 되면, 어렵게 맞춘 생체시계가 매일 조금씩 늦춰지게 된다. 즉,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아침에 늦게 깨는 것. 다시 출근을 하거나 등교를 하게 됐을 때 많은 시간을 잤어도 더 피곤하고 밤에는 오히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톨릭대 성모병원 정신과 전태연 교수는 “생체시계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적인 생활”이라고 말한다. 일상생활에 복귀하기 적어도 1주일 전부터는 서서히 생체시계를 맞추어 가는 것이 좋은데, 이는 외국여행을 갔다 온 다음 시차적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체시계는 햇빛, 사회적 자극, 활동 등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낮에 햇빛을 많이 받고, 적당한 활동을 하면 더욱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한다.



      ◆자기 전 컴퓨터는 금물

      방학 동안 아이들은 늦게 잠이 들고 늦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신동길 서초 함소아한의원 원장은 “아이들의 몸이 밤의 기운인 음의 기운을 잘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동물에 비해 음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밤에 잠을 안 자려는 아이에게는 제철 과일과 채소를 먹이면 도움이 된다는 것. 같은 이치로 육류의 섭취는 잠시 삼가는 것이 좋다. 과일이나 야채도 잠들기 직전보다는 낮이나 저녁 식사 전에 섭취하는 게 좋다. 특히 수박이나 참외 등 수분이 많은 과일은 잠이 들었다가도 화장실에 들락거릴 우려가 있으므로 저녁 식사 후에는 피한다. 또 자기 전 컴퓨터나 TV 등을 시청하는 것은 불면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규칙을 정해 낮 시간대에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잠들기 전 대추차 한 잔

      숙면을 위해서는 교감신경의 긴장을 풀어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 중요하다. 대추차와 오미자차는 긴장을 풀고 숙면을 돕는다. 특히 대추차를 잠들기 전 마시면 짧게 자더라도 숙면을 취할 수 있다. 대추씨에 신경을 이완시키는 성분이 있어 숙면에 도움이 되므로 씨를 빼지 말고 함께 끓이는 것이 좋다. 오미자차는 물과 함께 끓이는 것이 아니라 끓였다 식힌 물에 우려서 꿀을 첨가해 만든다. 사과산, 주석산, 유기산이 많이 함유돼 있어 신맛이 강하고 피로 제거와 기분 전환을 도와 쉽게 잠들게 해준다. 낮잠은 피한다. 그래도 밤에 쉽게 잠이 들지 못하다면 반신욕이나 족욕,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한다. 피로를 풀고 긴장을 완화시켜 잠이 잘 들게 도와준다. 어른, 아이 모두 마찬가지.

      ◆예민한 아이는 푸른색, 소심한 아이는 붉은색

      신촌 8+1 클리닉 전신철 원장은 체질별로 다른 색상을 이용해 숙면을 유도하라고 조언한다. 체질에 맞는 색지를 천장에 부착해 잠들기 전 아이에게 10~20분간 보여주면 효과가 있다는 것. 매사에 착실하나 내성적 성격이 강해 얌전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아이는 잠들기 전 붉은색을 바라보는 것이 좋고, 활동적이나 고집이 센 아이는 흰색으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좋다. 창의적이지만 신경이 예민한 아이는 푸른색을 바라보면 금방 잠들고, 의협심이 강하지만 성격이 급한 아이는 검정색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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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슬픈 장례식의 기록

                  - 왕비암살과 알려지지 않은이야기들

                  - MBC 시사매거진 2580, 13일(日) 오후 10시 35분 방영

                

                          

      1. 칼은 왜 신사에 보관되었는가

              - 일인 자객<명성황후의 시해>를 참회합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자객에 의해 사용된 칼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일본인 자객 토오 가쯔아키는 본인이 사건 당시 사용한 칼을 신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 사진 1>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사용된 토오가쯔아키의 칼, ‘히젠도(肥前刀)라고 불린다.  사진 = 혜문스님


      그러나  이칼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연유에 대해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쿠시다 신사에서 수킬로 떨어진 거리에 센신원(節信院)이란 임제종(臨濟宗) 계파의 절이 있었다.  이절에 방문해서야 취재팀은 칼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 2 > 센시원의 전경  사진 = 혜문스님


      “ 토오의 친척되는 분과 이절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오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참회하고, 칼을 이곳에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는 칼과 같은 흉기를 맡을 수 없기 때문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신 관음불상을 시주 받았지요.  ”


      사찰 관계자인 요시코 여사는 시종 진지한 어조와 미안한 듯한 표정을 한 채 조심스레 설명을 이어 갔다. 

       

       

      <사진 3> 토오가 세운 관음상. 명성황후의 얼굴을 참조로 만들었다고 전해짐

                  사진 = 혜문스님

       

       

      <사진 4> 관음상의 유래를 적은 비석            사진 = 혜문 스님

       

      그녀가 안내한 마당 한쪽 석조 관음상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관음상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 있었다.


      “1895년 민비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있었다.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죽어간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독지가들이 세웠다 ”


      비석은 아무 말없이 회색으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착잡한 심경에 잠겨 있던 우리들에게요시코 여사는 다시금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 저도 왕비암살사건에 대해 공부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왕비를 그렇게 무참하게 ...  토오도 많이 괴로워 했습니다. 노년에는 세상을 등지고 거의 수도승처럼 살았죠.  당시 사건에 연루된 후손들도 가끔 이곳을 찾습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괴로워 했다고 하더군요 ”


       

      2. 시해사건이 부른 피의 복수 - 이토오 히로부미의 암살

       

      명성황후의 시해에 참가했던 자객들은 이렇게 스스로의 죄과를 뉘우치고 있었다. 근심스런 표정으로 나즉히 나즉히 관음보살상의 내력을 설명하는 일본인 할머니의 얼굴 위로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의 얼굴이 겹쳐졌다. 국가 지상주의와 제국주의 팽창의 야욕이, 이렇게 평범하고 상냥한 한명의 개인을 전쟁의 귀신들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 졌다.


      “왕비의 암살이 한국사람들에게 준 슬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쓰노다 후사코 여사도 일본의 왕비암살은 역사의 참극, 복수의 피바람을 불렀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를 저격하며 그랬다는 군요.‘왕비의 복수’를 위해 이토오를 쏘았노라고... 결국 피는 피를 부르는 거겠지요 ”


      피는 피를 부른다... 백범 김구의 일대기가 스쳐갔다. 황해도 해주의 평범한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본명)가 파란의 일생에 접어든 이유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인의 만행에 분대한 청년 김창수는 일본인 군인을 타살(打殺)하고, 사형을 언도 받고 감옥에 갇힌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옥한 김창수는 독립운동에 투신, 임시정부 주석에까지 취임하게 되는 것이다.


       

      3.지금의 한일 문제를 생각한다

                   -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앞에서

       

       

      <사진 5>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그는 시해사건의 주모자이자 주동자이다.

                  사진 = 혜문스님

       

      오카모도 류노스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국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오카모도의 이름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 많다. 그가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음모를 꾸민 사람이고, 대원군을 납치 하고, 사건현장에 훈련대를 동원함으로써  조선의 내분으로 왕비가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려는 계획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은 도쿄 혼몬지라는 곳에 있었다. 이곳은 재일교포 역도산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역도산 무덤으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약간 들어가면, 나무그늘져 음산하고 으시시한 귀퉁이에 오카모도의 무덤이 있었다.

       

       동광(東光) 오카모도 유노스케

       

      동광- 평생을 정치공작에 힘써온 그의 일생을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기초를 놓고 있었던 시기.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그 사람이 살아간 문제의식을 그대로  노출시킨 단어였다.

      무덤에는 찾아온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누군가 수년전에 향과 초를 피운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자손이 없는 듯  수년째 아무도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의 심장을 찌르겠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고,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오카모도.  국가는 그를 이용해서 조선을 파멸시켰고, 결국 그도 상해에서 궁색하게 죽도록 강요했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가 우국지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이 한몸을 바쳐도 좋다고 , 일본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활활 불태우고 싶다고, 자신에게 스스로 수없이 다짐했을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성공했을때,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민족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4. 명성황후의 시해 그리고 슬픈 역사를 되새기자

               -에조보고서 '나체 만든뒤 국부검사 사실'보고

                                   

      해방 61주년을 맞은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되돌아 본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놓고 일본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카모도의 무덤앞에서면 섬찟함이 느껴진다. 언제 또 어느 일본의 우국의 지사가 한반도를 차지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가 없다고 주장할 까 두려워서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의 왕비에 대한 기록이 아니 기억 조차  없다.  이번 취재에서 전문을 구한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왕비는 시해후 나체로 국부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평상시 남자들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왕비는, 죽어서 이국의 사내에게 나체로 발가벗겨졌던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전 8시경 고종을 알현하고 시신을 확인한 조선공사 미우라는 경복궁 녹산에서 화장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석유를 붓고 불태워진 명성황후는 시체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고종의 아관파천 등으로  연기되어  2년 2개월동안 치러지지 못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이 슬프고 기나긴 국상이었다.  그 아픈 국상의 기록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왕궁 안에  있다는 웃지못할 비극이 오늘 나로 하여금 무거운 글을 쓰게한다.

       

       

      <사진 6>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발인반차도> 현재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

      한영우, <조선왕실의궤>에서 사진인용

       

      관련카페 http://cafe.daum.net/doorgatemoon

       

       


       

      후기  명성황후의 죽음 그리고 슬픈 국상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반환운동을 시작합니다.

       

       지난 7월 7일 조선실록 오대산본이 93년만에 고국으로 되돌아 왔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봉선사 주지 철안)는 2004년 도쿄대가 오대산 사고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약탈의 경위와 소장목록을 조사했다. 그리고 반환운동을 추진하며 기존에 알려졌던 46책 이외, 중종실록 1책이 더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또한 환수위는 1913 오대산 사고 에 소장된 3000여책의 전적중 일본 궁내청왕실도서관에 ‘왕실의궤’오대산본 44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그중에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2년 2개월에 걸친 슬픈 국상의 기록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궁내청 소장 의궤 반환운동의 과정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리고 암살당시 사용된 칼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글은 MBC 2580 취재팀과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이 8월1일부터 8월 4일까지 일본 일정을 정리한 취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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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틱구입-


      전문점에서 구입시에도 절대로 'T'자형은 구입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일자형을 구입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단순한 느낌으로 T 자형이 옳다고 생각하기 쉬우며 손바닥으로 T 자 윗부분을 누르며
      짚고 다닙니다. 잘못된 방법입니다.
      혹은 T형과 일자형이 일체로 된것도 있으나 역시 좋지 않습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지팡이 용도로 산행중에 사용할때는 T형도 가능하나 제가 강조하는것은
      전문 산행이나 종주시나 장거리 트레킹,또는 무거운 배낭을 메었을때,무릅을 보호하려 할때 등등..
      모두 일자 스틱이 맞습니다.

      대부분의 스틱은 충격완화 용수철이 내장 되어있으나 어떤면에서는 좋지 않은 점도 있읍니다.
      3단으로 조절 되는 용수철을 중간이나 가장 세게 조절하여 사용함이 좋습니다. 

      올바른 사용법

       

      1.스틱의 길이조정.


      먼저 스틱길이를 조절할때는 반드시 3단중에 제일 아래 가는부분을 약 반바퀴나 한바퀴만 좌측으로
      회전시켜 빼냅니다. 이때 최대한 한계선 직전까지 빼내어 오른쪽으로 돌려 적당히 고정 시켜 놉니다.
      다음 1단계 몸체 부분과 2단계 중간부분을 잡고 역시 조금만 돌려 길이를 조정 합니다.
      즉,길이 조절시 제일 밑부분은 최장길이로 빼어 고정이고 중간 2단계로 짧고 김을 조절 합니다.
      눈금도 중간에 있습니다.
      어떤이는 보기좋게 제일 밑부분도 절반 중간도 절반 식으로 조절하나 잘못된 방법입니다.
      그다음 중간에 있는 약3센티 길이의 프라스틱 손잡이들은 그냥 '캡'에 불과 하오니 꼭 스틱의 본체를 잡고 비틀며 힘차게 돌려 조입니다.(마무리로 조임을 모두 단단히 하지 않으면 내리막에서 스틱이 들어가며 사고로 이어질수 있습니다.)

      신장 170전후는 수치를 130에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분은 오르막은 짧게 내리막은 길게 조절하는 것이라 얘기 하지만 그것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짐작의 얘기 들입니다.
      오르,내리막 모두 길어야 합니다.(중요합니다.)
      오르막에서 스틱을 저~ 앞에 찍는것이 아니고 바로 발밑을 찍어 체중을 실어 올라타기 때문 입니다.
      (아래 오르막 요령 참조.....)

      2.스틱쥐는법


      스틱을 쥘때는 손잡이를 꽉잡아 사용하는것이 아닙니다.
      손잡이는 적당히 쥐고 손잡이에 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고리에 손을 넣을때에는 고리의 동그라미 밑에서 위로 손을 넣어 손바닥안으로 줄을 감싸며 손잡이를 줄과함께 거머쥡니다.

      손잡이로 오는 체중이나 힘의 방향은 손잡이가 아니라 고리로 와야 합니다.
      결국 스틱은 고리,즉 손잡이 줄을 짚으며 사용하는 것입니다.

      3.평지에서 스틱사용법


      보행시에 평지에서는 스틱이 절대로 발보다 앞으로 나가면 안됩니다.
      대부분 아무 생각없이 저~ 앞에를 쿡 찍고 걸어 갑니다.(스틱에 체중이 전혀 안실립니다.)
      그러면 등산용 스틱이 아니고 노인용 지팡이가 됩니다.
      약 45도 각도로 뒤를 찍으며 그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린시절 빙판에 썰매에 앉아서 꼬챙이를 저~앞에 찍었던 분이 아무도 없죠?
      약 45도 뒤를 밀어야 썰매가 앞으로 나아갔었던 것과 꼭 같습니다.
      다만 썰매처럼 두팔을 동시에 찍지 않고 발과 맞추어 교대로 찍으며 힘차게 나아갑니다.
      양팔을 콕콕 소리내어 찍어 나가면 힘 하나 안들이고 무자게 빠르게 보행이 됩니다.
      (축지법......)

      4.오르막, 내리막에서 스틱사용법


      오르막에서는 약간 앞쪽을 찍어야 하지만 아주 조금 앞이나 발과 같은 위치일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르막에 들어선 발쪽을 찍으며 스틱에 의지해 일어서듯이 체중을 옮겨 갑니다.
      마치 등로에 긴말뚝이 박혀있어 붙잡고 오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때 팔을 펴면 아무 소용이 없으며 팔을 접고 가슴과 어깨 팔의 근육을 모두 이용해서 누르며
      약 90% 의지해서 일어서는 연습을 합니다.
      손과 팔을 감아쥐어 엄지가 가슴쪽으로 향하게 하며 완전히 체중을 의지함이 좋습니다.
      직접 보여드리면 간단한것을 글로 하려니 표현이 어렵군요.

      내리막에서도 스틱을 2개 사용하면 계속해서 박혀있는 말뚝을 양손으로 잡고 내려가는것과 같은 효과 입니다.. 내리막에서도 발 가까운곳에 확실하게 찍어주며 체중을 의지 하지만 오르막처럼 많은
      체중을 실으면 안되고 가볍게 의지하며 만일의 미끄럼에 대비에 스틱을 앞뒤로 벌려가며 사용합니다.

      웬만한 바윗길도 손을 안짚고 안전하게 스틱을 이용해서 상쾌하게 갈수 있읍니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하지만 한 두번 산행에 꾸준히 손에서 놓지않고 사용하면 드디어 두발이 아닌
      네발 짐승이 되어 안전하게 산행을 할수 있게 됩니다.
      스틱은 무게에 1/3정도를 덜어 준다고 알려져 있으며 내리막에서도 스틱이 받쳐주는 체중의 분산으로 무릅이 많이 보호 됩니다.
      바위나 나무를 붙잡고 올라갈일이 생길때는 손잡이를 놓아버리면 스틱의 고리는 손목에 걸려서 대롱
      거리며 따라오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잡을것을 잡고 올라 오면 됩니다.

      5.마무리

      스틱의 중요한 '촉'이라 하는 끝부분은 바위나 여러 험로에서도 정확하게 찍히며 고정을 시켜주므로
      자주 점검하고 마모되면 교환 해주어야 하며 배낭에 패킹시에는 안전덮개를 꼭 착용시켜 사람의 눈을 다치게 하거나 기타 사고를 예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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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은 길다.   태평로에서 신답철교까지 6Km에 달하는 물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 만으로 여유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개발 과정과 역사적 유물이 제거되는 등의 문제점이 많긴 하지만 관광자원이기 전에 시민들의 쉼터라는 기능 하나만으로 가치가 충분하겠다.     ...
      출처 : 명랑여행총본산- 노매드(www.nomad21.com)
      글쓴이 : 노매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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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6] 일본, 부여의 아들

                            - 근초고왕, 야마도 일본의 건국시조인가? -


       

                                                                    김운회(동양대 교수)


       

       

      1. 부여 드라마


        드라마 ‘주몽’의 드라마 사상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부여를 일반인들에게 분명히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그동안 부여는 고구려의 위세에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으나 드라마를 통하여 부여의 많은 이야기들이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해모수와 금와왕의 우정이 드라마 ‘주몽’을 살려 드라마 초반의 인기상승에 큰 역할을 하였다. 어떤 드라마든지 첫 회가 중요한데 정평이 나 있는 한국의 중견 배우 들(전광렬, 허준호)이 이 드라마의 무게를 실어 주었고 그들의 검투 장면도 드라마를 살리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해모수로 분한 배우(허준호)의 카리스마에 반한 많은 시청자들이 해모수를 죽이지 말라고 극심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해모수는 자연사(自然死)할 수 있는 행운도 누리게 되고 자기와 유화부인 사이에 난 아들과도 대면할 수 있는 기적도 연출하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지속적으로 친한족 정책을 수행했던 부여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할수도 있지만 드라마 ‘주몽’의 작가는 금와왕과 주몽의 우정을 부각시킴으로써 범한국인의 일원으로 부여를 힘차게 끌어안고 있다. 물론 해모수와 금와와의 우정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부여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부여는 고조선만큼이나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서의 기록으로 본다면 부여는 고리국(코리국)에서 나왔으며 이 부여는 후일 제2 코리국 즉 고구려의 모태가 된 국가이기도 하다. 북한의 사학자 리준영은 범한국인의 조상으로 알려진 맥족은 고리국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를 연구한 북한의 탁월한 역사학자인 리지린 선생은 이 고리국이 바로 동호(東胡)라고 하고 있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1, 123쪽). 다시 말해서 동호(東胡)는 후일 거란과 몽골의 선조들로서 결국 이 동호로부터 고구려, 북위, 요나라, 금나라, 몽골대제국, 청나라 등이 나왔다는 말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동호는 요하(遼河) 지역으로 고조선의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있는 곳이기도 하고 쥬신족들의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온돌(구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요나라의 사서는 요나라가 단군왕검(텡그리옹군) 식의 통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국가임을 보여준다. 백제를 상징하는 구들, 구드리 등도 구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고 있다([특집4]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줄기차게 동호는 오랑캐의 대명사쯤으로 가르쳐왔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을 때 알타이에서 출발한 유목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한족(漢族)의 정체성이 견고화되는 한나라 이후를 기점으로 이들은 황하에서 현재의 베이징 - 요하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밀려 나간 것이 기원 전후의 사정이므로 이 시기에 요하에 터전을 잡은 나라나 민족이 우리의 뿌리에 가장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①]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

                            (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2. 험난한 부여의 여정 


        부여는 그 연원이 깊은 나라지만 자가 분열로 인해 형성된 고구려와 부족국가 또는 부족 연맹체 단계에 있던 다른 쥬신족들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음으로써 AD 2~3세기 이후에는 거의 만성적인 국가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부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친한족 정책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동 지방(남부여), 태백산지역(장백산 : 동부여), 반도 남부(반도부여),  일본 열도(열도부여) 등으로 끊임없이 보다 안전한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쉽게 말해서 부여의 분국(分國)이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남부여를 바탕으로 반도부여(백제)를 건설했겠고, 반도부여(백제)를 근거로 하여 열도부여(야마도 : 일본)를 건설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림 ②] 부여의 영역과 이동 


        부여는 AD 3세기 초 중엽에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그 주요 세력들이 남하하여 반도부여의 기초를 세우고(부여계의 2차 남하) 다시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시기에는 만주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지고(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102쪽), 백제는 한반도에서 왕성한 정복활동을 전개되고 있다(전라도, 낙동강, 황해도).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시기에 벡제의 근초고왕은 20여 년간 잠적하는데 이 시기(349~363)에 일본에서도 활발한 정복사업이 시작되고 있다(부여계의 3차 남하).


        백제 관련 연구자들은 “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부여 세력이 반도로 이전해온 것일 뿐이다.


        더욱 주목할만한 일은 이 시기(4세기)를 즈음하여 7세기 초까지의 일본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분(古墳)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야마도 정부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고 미마나(任那)라는 식민지 운영을 시작했다고 하고 있고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비족이 진씨(眞氏)가 되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진씨(眞氏)가 일본의 황족(皇族)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재위 : 346~375)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백제는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간 시기(『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와 일치하고 있다. 즉 북만주 지역의 부여는 거의 붕괴직전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여의 주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부여계 3차 남하).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무덤양식의 변화가 있다. 서울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즉 4세기 후반에 만주지역의 무덤양식이 느닷없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사를 연구한 홍원탁선생에 따르면 백제의 왕위는 166-346년 기간 동안 4대 개루왕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면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고 고이 계열(부여계의 2차 남하 세력)의 마지막 왕인 계(契)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근초고왕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진서(晉書)』를 포함한 여러 중국 사서들에서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여영(餘暎), 전지왕(典支王)은 여비(餘毗), 반유왕(畔有王)은 여경(餘慶), 개로왕(蓋鹵王)은 여융(餘隆), 무령왕(武寧王)은 여명(餘明), 성왕(聖王)은 여창(餘昌)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 29대 무왕(武王)부터는 부여장(扶餘璋)으로 부여(扶餘)씨로 기록하고 있다(『수서(隋書)』『당서(唐書)』).

       

        참고로 『삼국유사(북부여)』의 기록에는 “古記(고기)에 이르되 전한서에 宣帝(선제) 신작 3년 임술 사월 팔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게지역임]에 내려와서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 : sun)로 씨(氏)를 삼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집3], [특집4] 참고).  

       

       

      3. 일본, 부여의 아들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이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일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면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오우진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처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으로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이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한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따라서 오늘날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일본인들이 야마도 정신(일본 정신) 또는 야마도의 혼(魂)이라고 하는 그 정신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정벌해서 조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진구황후가 활약한 시기를 비교해보면 다른 사서에서는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이라다께 목라근자 등을 보내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업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진구황후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백제전문가 이도학교수에 의하면, 『일본서기』에 근초고왕 당시 전라도 지역에 왜(倭)의 군대가 활동한 것(『日本書紀』神功 49年)도 사실은 근초고왕이 주도한 것이다고 한다. 결국 근초고왕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군대가 이동한 것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이 정복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져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보병전(步兵戰)으로는 불가능하고 대규모의 북방 기병(騎兵)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남 호남 등의 지역은 넓은 평원이 있어 기병전(騎兵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근초고왕의 업적으로 추정되는 일을 한 사람인 진구황후가 실존인물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문헌외에 진구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인물로는 3세기 왜 여왕 히미코인데, 히미코여왕의 업적과 진구황후의 업적의 실질적인 공통성은 하나도 없다. 히미코 여왕은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갈등이 심한 각 부족들간의 화합과 조화를 이끌어 내었던 영명한 군주였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39년, 40년, 43년의 기사는 히미코의 기사로 대체해두고 있다. 그러면 히미코를 진구황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정작 히미코는 진구황후와는 공통성이 없어 이 기록들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왕의 업적을 끌어다 놓은 것이다.


        필자는 이 진구황후는 근초고왕 + 히미코 + 사이메이천황 등의 모습을 하나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은 백제 구원을 위한 국가적 사업을 하다가 중도에 서거한 여자 천황이다. 일본인들이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사이메이 천황을 진구황후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초고왕 또는 그의 처족인 부여의 주류 씨족(진씨)이 가야계와 연합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여 고대 일본의 야마도 왕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구당서』에서는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백제와 일본의 기본 통치세력은 남부여계(南扶餘系)이고 이들 남부여계 씨족들은 결혼(結婚)을 통해 더욱 관계가 공고화된다.



                   [그림 ③] 절대권력의 상징 오우진 능


        일본의 저명한 사가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오우진 (호무다) 이전의 천황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진무(神武)와 오오진(應神)은 동일인이라고 보는데 동일인을 굳이 모자의 관계로 둘로 나눈 이유는 당시 오오진이 너무 잔인하게 열도를 정벌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는 의도라고도 한다.


        미즈노유우(水野 祐) 교수에 따르면, 오우진․닌토쿠(오우진의 아드님) 왕조(카와치왕조)는 외래 민족의 세력으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왕조로 기본적으로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부여)으로 대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대륙의 사정에 대해서도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 1978)].

       

        그런데 오우진 천황이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眞氏)라는 것이다. 야마도 조정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오우진계의 씨족 이름이 진[眞, 眞人(마히토 : マヒト)]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백제의 친왕(親王)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신찬성씨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던 사람들은 오우진계의 천황들의 성은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라고 한다[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지문사 : 1982) 204쪽]. 특히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들은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함으로써 진씨 왕후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이기백․이기동『韓國史講座Ⅰ : 古代篇 』(일조각 : 1983) 37쪽].

       

        참고로 백제의 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계보(系譜)를 참고로 살펴보자. 이 그림은 2십년 이상 백제와 일본의 왕가 계보를 연구한 홍윤기 선생(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견해이다. 

       


             [표1] 백제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관계도
                  (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61쪽 재구성) 


        [표1] 의 계보 표를 보면 개로왕(蓋鹵王 : ?~475)의 아드님이신 곤지왕자(昆支王子)는 두 손자를 한 쪽은 백제, 한 쪽은 일본에서 모두 최고 권력자로 등극시키고 있다. 그런데 곤지왕자가 활약하던 때는 장수왕의 침입으로 부왕(개로왕)이 세상을 떠나는 등 백제가 “회복 불능” 한 상태에 빠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근초고왕 때에도 상황이 비슷한데 근초고왕은 백제(반도부여)를 통치하고 근초고왕 자신 또는 왕비족(王妃族)인 진씨계(眞氏系)는 일본(열도부여)을 경영하였듯이, 개로왕의 죽음 이후도 곤지왕자의 가계를 중심으로 열도부여와 반도부여는 하나의 왕조를 형성하게 된다. 개로왕은 『삼국사기』에는 여러모로 나쁘게 묘사되어있지만  실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안간힘을 쓴 분이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백제와 일본의 왕가는 너무 얽히고설켜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를 정도로 친족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차라리 하나의 왕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반도부여의 성왕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가장 헌신한 분으로  열도부여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하여 최고의 존칭으로 부르고 있다. 마치 동명성왕을 부르는 듯하다.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테이칸 기시키(貞觀儀式)』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貞觀儀式』「園倂韓神祭」).”고 하는데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오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聖明王) 즉 남부여(백제)의 대표적 성군으로 부여의 부활을 꿈꾸다가 산화(散華)한 성왕(聖王)이다. 일본인들은 성명왕(聖明王 : 성왕)을 이마키노가미(今木神)으로 높혀 부른다. 바로 쥬신(Jüsin)의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반도부여의 성왕(백제 성왕)은 일본의 국신(國神)이다. (상세한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제1권 일본신들의 고향 참고)

        이러한 상황은 고고학적 발굴으로도 증명이 된다. 일본 고분문화의 특성은 반도부여가 한반도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AD 4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급격히 바뀌고 있으며 그 고분의 성격이 쥬신 즉 만주와 몽골 지역 등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실용적(實用的)이며 군사적(軍事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근초고왕이 백제를 지배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고 특히 근초고왕의 행적은 20여 년이 나타나지를 않아서 일본 열도의 정벌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를 참고할 것). 더욱 이상한 일은 이 4세기 후반에 대한 일본 역사의 기록이 없어 흔히 ‘신비의 4세기’라고 한다. 일본의 사가들에게 이 시대의 역사는 말못할 사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그것은 반도부여(백제)의 정치사적 변화와 그대로 일치한다.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의 정치적 교환관계(交換關係)가 단순히 본국(本國) - 지방정권(地方政權)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와 같은 정도의 혈맹적인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연맹왕국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는 범부여 연합국가(USB : United States of Buyou)라는 것이다.


        두 나라는 국가원수의 교체에 있어서도 서로 관여하는 등 거의 한나라 수준의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정치적인 일체성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백제의 진사왕이다. 또한 백제 - 가야 - 일본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실제 기록들이 『일본서기』에는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긴메이(欽明 : 531~71) 천황 2년에 백제의 성명왕(523~554 : 백제 성왕)이 가야에서 온 여러 사람들에게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의문스러운 점은 백제의 무왕이나 성왕은 일본의 죠메이천황(舒明天皇 : 628-641) 및 긴메이천황(欽命天皇)과 동일인이라는 여러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小林惠子『二つの顔の大王』(文藝春秋 : 1991)].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연합국가 범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다. AD 4세기에서 AD 7세기 반도부여(백제)의 멸망 때까지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는 연맹국가 이상 또는 같은 나라 수준이 아니면 곤란할 정도의 생산요소(production factors)나 국가자원(national resources)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하나하라(埴原和郎)는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渡來人)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 지방의 대부분 사람들이 도래인(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다.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까지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東京大學人類學雜紙 1987年 英文版「古代日本 移住者 數 推定」). 당시 교통수단이나 인구의 수준을 감안해 보면 이는 국가적인 이동에 해당한다. 


        AD 5세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반도부여(백제)는 대장장이․토목공사전문가․양조업자․의복재단사 등의 전문직 사람들을 대거 보냈으며 403년에는 궁월군[弓月君 : 하다씨(秦氏) 씨족의 시조]이 무려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 아지사주(阿知使主 : 아야족의 시조)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왔으며 463년(유략쿠 7년)에 대규모의 기능공들이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등 반도부여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오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앞의 책을 참고할 것)


        뿐만 아니라 반도부여(백제)에서 열도부여(일본)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반도부여의 수준에 준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국가적 동일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즉 당시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인원이 일본으로 갔는데 이들은 백제에서 가졌던 지위에 따라 일정한 직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은 백제왕(百濟王)이란 호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일본 조정의 고위인사들이었다(『續日本記』) 귀족들의 경우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일본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략 60여명 정도의 백제 유민이 일본의 조정에 참여했으며 일본의 『고사기(古事記)』(712)나 『일본서기(日本書紀)』(681~620)의 편찬에도 깊이 개입한다.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범주에 둘 수 있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할 당시 반도부여(백제)를 방어하고 지키려는 일본의 의지가 하나의 나라가 아니면 곤란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일본은 마치 국운(國運)을 걸고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원정 해군을 지휘했으며 나카 왕자는 5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백제를 원조하게 했으며 풍왕자는 5천명이 넘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6명의 장군이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로 갔으며 당시 백제 부흥운동을 위해 파견된 백제의 좌평 복신(福信)에게는 화살 십만 척, 실 5백 근, 솜 1천 근, 피륙 1천단, 다룬 가죽 1천 장, 종자 벼 3천 석이 주어졌고 다시 피륙 3백단을 백제왕(풍)에 주었다(『日本書紀』「天智天皇」). 이러한 일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제․일본 연합군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패배하여 일본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三國史記』「百濟本紀」.).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서기』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日本書紀』「齊明天皇」).”라고 하고 있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 서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



       

                  [그림 ④] 반도부여의 슬픈 유적 : 백마강과 낙화암 

          

        이상의 논의들을 토대로 본다면 일본은 바로 반도부여를 이은 부여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백제와 일본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부여(扶餘)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가 있다.

       

       

       


      참고 『대쥬신을 찾아서』제1권

              12.일본 신들의 고향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18. 왜 한국인들의 이름 -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관련 사이트 : www. ebiz114.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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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면에 설탕을 넣더라.


      누구나 그렇듯 중고등학교 매점에서 먹었던 라면을 그리워할 것이다. 또 학교때 매점 아주머니가 라면 끓이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물어본적이 있는데 그 진상은 라면 1개당 설탕 반스푼정도를 넣는 것이다. 이 맛은 라면 미식가라면 뭔가 확실히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험해 보라.



      라면에 후춧가루



      전에 군 생활하는데 라면이 생겨서 취사장엘 갔다. 물론 취사장에서 불을 켜면 들키니깐 불은 끄고 라면을 뜯고 물도 대충 붓고 더듬더듬 근데 결정적으로 고춧가루를 넣는다는 게 그만 후추가루를 넣고 말았다! 그래서 라면을 끊이는데~앗! 실수로 넣은 후추의 맛이!!! 이럴 수가!! 상황도 상황이고 하니 당연히 맛있겠지 하실 분들(모르는 소리) 지금도 제대한지가 1년이 훨씬 넘었지만 야간에 가끔 이런 식으로 끊여 먹으면 추억도 새록새록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후춧가루가 왕창 들어간 라면! 한번 해보자.



      라면 순하게 먹기


      대단한 것은 아니고 집에 두부가 조금 있으면 꺼내서 얇게 잘라 라면 끓일 때 넣으면 라면이 순해진다. 두부를 너무 살짝 익히면 두부의 스리슬쩍 넘어가는 부드러운 맛을 못 느끼니 두부는 약간 오래 익힐 것.



      라면과 깻잎의 조화!!


      참치김밥의 경우 참치의 기름기를 빼기도 하지만 깻잎이라는 것 때문에 더욱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라면을 끓이고 막판에 깻잎을 넣어주면 깻잎 특유의 고소한 향이 라면에 푹 베구 맛도 일품이다. 한봉지당 깻잎은 5~7매가 적당. 김을 넣어도 좋다. 바싹 마른 김을 다 끓인 후 뽀사넣으면 김특유의 향이 라면 맛을 돋궈준다.



      라면을 두배 맛있게


      라면에 식초를 아주 약간 넣는 것이다. 라면에 식초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 라면에 감칠맛을 더할뿐더러 끝맛을 깔끔하게 만들어주고 결정적으로 라면의 독성을 제거해준다. 라면하나에 식초 한스픈 정도로 잡고 한번 실험해 보라. 스프를 넣을 때에 거품이 눈에 뜨이게 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거품은 곧 독성물질을 뜻하는 것이니깐.



      프로는 계란을 이렇게 푼다.


      라면을 보다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 계란을 넣는데 계란을 넣는 타이밍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 보겠다. 계란은 미리 풀어서 그것에 깨소금과 참기름. 그리고 약간의 후추를 뿌려두면 준비끝~ 그 상태에서 라면이 거의 90프로 끓었을 시에 넣어주면 된다. 너무 일찍 넣으면 딱딱해지고 너무 나중에 넣으면 휙휙 겉돈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리고 뿌릴 때도 그냥 휙~~넣지 말고 가장자리서부터 한바퀴 돌리듯이 넣으면 훨씬 골고루 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일반 분식점에서도 널리 이용되는 방법이다. 하나더 미적 효과를 중시하는 사람은 흰자는 위의 방법으로 풀고 노른자는 라면이 다 끓은 후에 불을 약하게 하고 면 위에 깨지지 않도록 살짝 올린 후 잠시 익힌다. 라면봉지와 같은 그림이 된다.



      유난히 느끼한 것이 싫다면


      면과 국물을 따로 끓이기도 싫고 라면의 기름기는 싫고 그렇다면 마늘 빻아놓은 것을 넣어보라. 우리나라 음식에 마늘 안 들어간 음식이 없거니와 실제 넣으면 뒷맛이 깔끔해지고 라면에서 이런 맛도 나오는구나.. 할 것이다. 마늘 좋아하는 사람은 필수



      치즈를 넣어라


      치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라면 완성직전 뜸들일 시간에 피자를 넣어보라. 피자를 넣고 뚜껑을 닫고 경건한 마음으로 식탁에 가져온 후 먹는다. 이때 라면위에 얻쳐진 치즈를 휘젓게 된다면 상상하지 못할 상황이 되니 금물, 치즈 얹힌 라면을 후루룩 먹으면 끝. 그냥 치즈대신 피자치즈를 잘게 잘라서 뿌려도 된다. 아 그릇에 옮겨서 뿌려도 된다. 본인은 항상 냄비 채로 먹기땜시...



      각종 국을 이용하라


      느지막이 일어났다면 지금 해는 중천에... 집에는 아무도 없고 밥도 없다. 혹시 집에서 살림(식순이?)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한 그릇도 안 되는 국이 냄비에 남아있다면 난감하게될 것이다. 먹자니 같이 먹을거리가 없고 안 먹자니 남기기도 모하고.. 이럴 때 과감히 라면에 응용하라. 라면을 위해 고기국물을 우려내는 것은 무모한 짓이지만 남아 있는 소고기무국에 라면을 끓이는 것은 결코 무모한 짓이 아니다. 술한잔 거하게 했으면 콩나물국을 찾아보라. 콩나물라면이 해장에 도움을 줄 것이다. 속이 허하면 어제꺼 먹다 남은 백숙 그릇을 보라. 그 국물로 라면을 끓이면 백숙보신라면 (?)쯤이 될 것이다. 비유가 허락한다면 모든 국이 가능하다. 이때는 국에 기본 양념이 되어있기 때문에 스프는 조금만 넣을 것. 스프가 원래 국의 맛을 버린다 싶으면 소금 혹은 간장으로 간을 해라.



      비린내나는 라면에는 이렇게..


      역시나 보기 좋게 만든 라면이라도 비린내가 난다면 다 먹기 힘들 것이다. 이때는 커피를 조금만 넣어보라 실제 족발집에서도 돼지의 비린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커피를 넣는다. 비린내를 없애는 첨가물은 마늘, 생강, 심지어 레몬이나, 술을 넣는 경우도 있으니 참고.



      식초는 저리 가라 - 타바스코소스


      라면이라고 하면 모두 느끼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느끼하다는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먹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방법은 있다. 하나는 여러분들도 많이 알고 있는 식초! 그리고 또하나는 바로 타바스코 소스! 식초야 물론이고 타바스코 소스 역시 약간 신맛을 가지고 있다. 식초는 알고 계신 것처럼 티스푼으로 하나 정도, 타바스코 소스는 집에 돈이 많다면 많이 넣어도 괜찮지만 적당히 넣자. 피자헛 같은 곳의 타바스코소스는 정작 할인매장에서도 구입하려하면 비싸지만 잘 뒤지면 싼 종류의 타바스코 소스를 구할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길 바란다.



      진짜 깔끔한 라면을 먹고싶으세요?


      국수 끓일 때 넣는 멸치다신물 아는가? 그걸 한 냄비 끓여서 PET병에다 넣고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배가 엄청 서럽다싶으면 냅다 꺼내서 라면 넣을 물 대신에 사용해 보라. 평소 라면의 느끼한 맛에 정을 못 붙이던 분들도 뻑 갈 것이다. 그냥 맹물라면은 쨉도 안 된다. 응용편으로 냉라면 계열의 라면도 만들 수 잇다. 멸치다신물이 너무 대단하다 생각되면 다시마 물도 괜찮다.



      계란은 국물 맛을 버린다.


      흔히들 라면엔 계란을 풀어서 끊인다. 라면에 계란을 넣지 않고 끓이는 이유는 둘중 하나. 첫째는 냉장고에 계란이 없어서 일 테고 둘째는 라면의 참맛을 알기 때문이다. 라면에 계란이 들어가면 맛을 버린다. 하지만 영양학 상으로는 라면 하나 만으론 영양이 부족하다. 국물까지 쪽쪽 빨아먹는다 해도 500Kcal를 넘기기가 힘들다. 이래 가지고선 한끼 식사론 너무 부실하다. 하지만 라면 맛도 살리고 계란을 넣어 영양가도 보충하는 방법이 있다. 라면이 보글보글 끓을 때 계란을 깨쳐서 넣긴 넣되 절대 젓가락으로 젓지 않는다.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면 환상적인 라면 본래의 맛과 함 께 얇게 펴진... 그러면서 국물도 혼탁 시키지 않는 계란도 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달걀을 풀어서 넣어야 하는 음식으로 대표적인 것은 만두국이나, 계란국이다. 이 때 보통 파와 함께 완전히 풀어서 넣는 것으로 심심한 국물의 맛을 없애고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한 것이다. 라면을 보다 담백하길 원 한다면 계란을 푸는 것도 가능하다.



      우유로 라면을 끊인다면..


      진짜 우유라면을 끓인다면 물 대신에 우유를 넣고 스프 대신 소금(혹은 간장정도)으로 간을 하는 것이다. 허나 이 방법은 너무 싸이코틱 라면으로 가는 얘기고. 우유를 전부 넣을 경우 라면은 사리곰탕이나 진국설렁탕등의 면을 사용한다. 물이 쉬 끓지 않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맛은 매우 담백하고 진국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라면의 비릿한 맛을 없애기 위해 끓인 후 우유를 섞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라면의 강하고 매운맛을 없애고 부드럽게 만들어주기에 노약자, 어린이들에게 좋다 라면을 끓일 때물을 조금만 넣어 끓이고 마지막에 우유를 약 50~100ml 정도를 넣어주면 좀더 담백한 라면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우유대신 두유를 넣는 사례도 있으니 참고하길. 단 라면에 따라 피보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



      라면! 쌈장을 넣구 끓여보라!!


      라면에 쌈장 넣구 끓여 보았나? 우선 해물라면(흰색봉지)이 사용되고 다른 라면의 경우 맛을 책임질 수 없음을 유의하라. 우선 물을 팔팔 끓인다. 그리고 쌈장과 간장약간. 고추가루 듬뿍 거기다 스프까지 넣고 5분 정도 더 끓인다. 그 다음에 라면을 넣는다. 결과는 라면면발 하나하나에 쌈장특유의 구수한 맛이 스며들어가서 국물이 죽인다. 단 쌈장은 슈퍼 파는 것을 바로 투입하면 안되고 집에서 약간 손봐야 한다. (참기름과 마늘, 야채 약간등)



      면발에 힘주기


      분식집에서 먹는 라면은 시간이 흘러도 면발이 퍼지지 않고 꼬들꼬들하다. 그 비법을 공개한다. 사실은 이 방법은 잡지나 TV에서도 나온 방법으로 라면을 적당히 설익을 때까지 끓이다가 뚜껑을 덮고 불을 끈 채로 약 1분간 뜸을 들이는 것이다. 자주 먹는 라면이 면발이 확실히 다르다는 거 느낄 것이다.


      출처 : 청사초롱
      글쓴이 : 불나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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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renade - Jim Brickman  
      Butterfly Waltz - Brina Crain 
      Havana Sunset - Govi 
      Loving You - Oscar Lop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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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

       

      국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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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석기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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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 시대

      --------

       

      2500

      고조선(단군조선)
      BC 2333 ~ BC238

       

       

      2000

      청동기 시대

       

      1000

       

      500

      철기 시대

       

      400

       

      300

       

       

      200

       

      100

      북부여 BC239-BC58

       

      BC 50

      신라
      BC 57~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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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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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

      고구려
      BC 37~668
      신라에 멸망

      백제
      BC 18~660
      신라에 멸망

       

      AD 50

      가락(가야)
      42~532
      신라에 귀순

      100

      200

      300

      400

      500

      600

       

      650

      700

      통 일  신 라
      고려에 귀순

      발해
      698~926
      거란에 멸망

      800

      850

      900

       

       

      태봉(후고구려) 890~918
      고려에 멸망

      후백제
      892~935
      고려에 멸망

      950

       

      1000

      고려
      918~1392
      조선에 멸망

       

      1100

      1200

      1300

      1400

      조선 1392 ~ 1910

       

      1500

      1600

      1700

      1800

      1900

      1910

      일제 강점기 1910 ~ 1945

      1945

      1945

      미군 군정 1945 ~ 1948

      1948

      대한민국 1948 ~ 현재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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